파괴와 패배 #
#2019-07-19 19: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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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는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요즘에는 이 반대가 진실이 아닐까 싶다. ‘나는 패배했을지는 몰라도 파괴되지는 않았다.‘라고 말이다.
요컨대 현대인은 자기방어와 자기보호로 인해서 자신이 파괴되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파괴되지만 않는다면 패배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생존본능과 자기보존본능이 극대화된 현대인들은 이제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바다에 나가 목숨을 걸지 않는다. 자신이 조금만 파괴될 위험에 처해도 바로 백기를 들고 항복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살아남았지만 이미 죽어있다. 생존했지만 살아가지 못하고 숨을 쉬지 못한다. 생물학적인 생존을 위해 상징적인 패배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생명정치는 인간에게 파괴될지 모른다고 협박해서 패배선언을 받아낸다. 그래서 가끔은 상징적으로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이 자살테러로 반항을 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세상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받아냈던 이젠 아무 가치도 없어진 생존을 도로 반납하는 것이다.
생존을 볼모로 협박을 하는 세상에게 우리는 파괴되지 않기 위해 패배를 선언한다. 그리고 얌전히 회사를 다니고 소확행을 즐기면서 종말의 인간으로 살아간다. 그래도 파괴되지는 않았다고 위안을 하면서. 살아남기만 하면 세상엔 좋은 것들이 많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이 세상은 패배를 선언한 사람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허락해준다. 파괴되지만 않는다면 세상엔 즐길게 많다고 세상은 협박과 동시에 유혹을 한다. 채찍이 파괴의 위협이라면 당근은 소확행인 셈이다.
소시민은 이렇게 완성된다. 전혀 파괴되진 않았지만 완벽하게 패배한 모습으로. 회사를 다니며 소확행을 즐긴다. 니체가 예언한 종말의 인간이 현실화된 것이다.
현대인의 행복은 패배했지만 파괴당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에서 나온다. 파괴당하지만 않는다면 쇼핑몰에 가서 소비라는 만병통치약을 복용할 수 있다. 여행을 가서 힐링을 받을 수도 있다. 연애를 할수도 있다. 근데 왜 우리가 파괴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현대인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 나는 패배했을지는 몰라도 파괴당하지는 않았다고 말이다.
현대의 자유가 점점 자기파괴가 되어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세상에게 패배하지 않고 자유로우려면 자기파괴를 감당해야 한다.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처럼.
나는 파괴와 패배의 양자택일에서 패배를 선택했다. 그리고 소시민이 되어서 얌전히 회사를 다니며 소확행을 즐기며 살고 있다. 나는 종말의 인간이 되어 행복을 얻었다. 연애를 하고 여행을 다니고 소비를 하고 쇼핑몰에 가고 티비를 보고 그렇게 파괴되지 않았다고 안도감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물론 모든 현대인들이 전부 다 종말의 인간은 아닐 것이다. 그중에는 파괴를 감수하고 패배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수는 점점 줄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단 공무원이 꿈이면 파괴당하지 않는 것을 일순위로 하는 것이 확실하다.
소년만화는 전형적으로 파괴당하더라도 패배하지는 않는 주인공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만화 캐릭터라서 그런지 파괴되더라도 죽지 않고 사이어인처럼 더 강해지기만 했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은 소년만화 주인공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하지만 주인공을 제외한 많은 등장인물들은 파괴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한마디로 소년만화를 따라서 모험을 하다간 죽기 딱 좋다는 거다. 누구나 자신을 주인공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은 금방 죽어버리는 엑스트라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현대인들은 대부분 세상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고 자신은 파괴되지 않았다고 안도하며 비겁하게 생존을 이어나간다. 그게 소년만화를 더 이상 믿지 않는 성숙한 지혜로운 어른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그런 어른들, 종말의 인간들, 현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시민들에게, 파괴되었지만 패배하지는 않은, 즉 세상에게 승리한 사람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그들은 영웅,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소시민과는 다른 세계의 신화적 존재가 된다. 하늘 위의 별들이, 스타가 된다. 초인이 된다.
소수의 파괴되었지만 패배하지는 않은, 즉 승리한 초인들이 있고 다수의 종말의 인간, 패배했지만 대신 파괴되지는 않은 소시민들이 있다. 세상은 그렇게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뉘어진다. 신기하게도 부 역시 정확히 이렇게 양극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