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럭 한점 우주의 맛 #
#2019-10-03 02:27:57
그와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삶을 알아갈수록 그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했다. 애초에 그는 나와 뭔가를 맞출 생각이 없었고, 다만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밤마다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어린애인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나와 몸을 섞는 일을 즐거워했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바꾸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겼으나, 불행히도 나는 누군가에 의해 쉽게 바뀌는 성격이 아니었다.
#
형이 과거에 학생회장이었는지, 뭐 얼마나 대단한 운동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서 저자 욕이나 하며 맞춤법을 고치는 별 볼 일 없는 남자잖아요. 나만큼이나 보통의 사람이잖아요. 형은 그냥 나한테나 중요한 사람인 거 같은데, 그래서 나한테 이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 거겠죠. 압구정동 출신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해 도청을 당하는 20대를 살았으며 지금은 죽은 철학자의 글을 읽고 고치는 당신의 뇌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엉망진창 낙서장이 되어버린 당신의 등과도 꼭 닮아 있지 않을까. 그런 당신을 좋아하는 나는 어떻고. 뭐 이런 말들을 정신없이 쏟아놓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고, 다만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해버렸다.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
나는 그녀의 집요한 필사가 구도자의 고행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본의 아니게 일어난 불행에 대해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머리를 쥐어뜯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 모나미 볼펜으로 공책에 꾹꾹 성경을 눌러쓰는 방식을 택한 것이겠지. 마취조차 거부했던 엄마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삶의 방편이었기에 그녀의 필사는 일종의 호흡처럼 느껴졌다. 들숨에 한 글자, 날숨에 한 글자.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앓았던 열망과도 닮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에 대한 열망?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열망? 그래, 한없이 나 자신에 대한 열망.
예수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열렬히 삶에 투신하는 자신에 대한 열망. 어쩌면 한때 내가 그를 향해 가졌던 마음, 그 사로잡힘, 단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에너지도 종교에 가까운 것일지 모르겠다. 새까만 영역에 온몸을 던져버리는 종류의 사랑. 그것을 수십년간 반복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형태의 삶인가.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 것인가.
#
사흘 뒤,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친한 형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명처럼 곁들여져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친한 형. 급한 일.
그래, 그랬겠지. 급한 일이 있었겠지. 바빴겠지.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우리는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
_너 유치원 다닐 때였나. 한번은 너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얘가 유치원이 끝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집에 오지 않더라. 전화해보니 유치원 버스에도 타지 않았다고 하고. 친구 집에 간다고 했대. 난리가 났지. 신발만 대충 꿰어 신고 나와서 유치원에서부터 허겁지겁 너를 찾는데 멀리 네 뒷모습이 보였어. 나는 가만히 네 뒤를 따라갔다. 네가 두발쯤 걷다 자꾸만 멈춰 서기에 뭐 하나 봤더니, 거리에 있는 모든 가게 앞에 서서 일일이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때로는 만져도 보고 그러고 있더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 모습을 뒤에서 보는데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덜컥 무섭더구나. 네가 더이상 내가 아는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네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네가 걷고 싶은 길을 너의 속도로 걷는 게, 너만의 세계를 가진 아이라는 게 그렇게 섭섭하고 무서웠다.
_그때부터 산만했나봐, 나.
_그래서 너를 많이 괴롭혔던 것 같네. 간이 작아서. 너를 간장 종지처럼 좁은 내 품안에 가둬놓고 싶었나보다.
엄마는 반쯤 잘려나가고 없는 간 부분을 만지며 씨익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_나 화장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멨다. 그리고 얼른 화장실 쪽으로 뛰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습관처럼 장애인 칸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좌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방을 벗었다. 그 속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손에 쥐었다. 종이 위에 삐뚤삐뚤한 내 글씨와, 그의 빨간 글씨가 겹쳐 보였다.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두번에 나눠 찢었다. 종잇장 하나하나를 낱낱이 찢어 좌변기에 집어넣었다. 글씨가 물에 닿아 빨갛게 번졌다. 물을 내렸다. 종이들이 파문을 그리며 검은 구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를 안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마치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그동안 울 시간은 충분했다. 종이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물 내리기를 반복한 나는 숨을 고른 뒤 빈 가방을 다시 둘러멨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