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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2 ⋯ 불행 속 우아함

해소되지 않은 기분은 성격이 된다. 작은 짜증으로 시작된 기분은 일상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고 속속들이 헤쳐 모여 결국 더러운 성격으로 완성된다. 어떤 성격으로 살고 싶은지는 빼곡히 적은 새해 다짐이 아니라 일상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달려 있었다. 사람의 진짜 우아함은 무너졌을 때 드러난다고 한다. 윗사람에게 깨진 날 후배를 대하는 태도나 안 좋은 일이 넘친 날 웃응며 인사할 줄 아는 여유에서 우린 그 사람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우아함이란 다시 말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두 조각 난 날에도 평소처럼 인사하고 웃고 공들여 사과할 수 있는 태도. 한때는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아니 요즘처럼 내 감정 참는 게 손해인 시대에 저런 고리타분한 태도가 필요하긴 해? 나만 손해잖아. 근데, 필요하더라. 무너진 날조차 우아함을 유지하는 나를 보며 남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것에 무너지지 않아." 우아함이란 결국 나를 위한 태도였다. 마음이 지옥 같은 날, 모든게 실패한 것 같은 날일수록 보다 공들여 웃고 감사하고 인사하자. 나를 위해서.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 작은 태도가 어떤 말보다 강력한 신호가 되어줄 테니. 현명한 사람일수록 함부로 불행해지지 않는다. 현명함이란 행복의 양을 늘리는 것보다 불행의 양을 줄이는 데 더 많이 쓰인다. 일단 한번 불행으로 물든 마음은 어떤 행복으로도 쉽게 퇴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월급날이어도 승진을 해도. 아니 원하는 모든 목표를 다 이뤄내도 가족이 아프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듯. 불행은 행복에 비해 너무 강하고, 구체적이다. 행복이 상상이라면 불행은 일상인 것이다. 어른이 될수록 불행에 대한 수비력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내 인생이 진짜로 그렇게 불행해?’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아니 몇 날 며칠이고 홀로 답을 적는다. 그러다 보면 대체로 답이 간단해진다. 내 인생은 생각만큼 불행하지 않고, 생각보다 행복하다. 출처 책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2025-04-21 ⋯ 목표를 이루는 확실한 방법

오늘의 세상 모습이 어떻든, 무엇이 당연해 보이든, 내일이 되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작은 우연 때문에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 돈과 마찬가지로 사건도 복리 효과를 낸다. 그리고 복리 효과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미약하게 시작된 뭔가가 나중에 얼마나 거대해질 수 있는지를 처음에는 직관적으로 느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정보로 넘쳐난다. 사람들은 그 모든 정보를 꼼꼼하고 차분하게 살펴보면서 가장 합리적의고 옳은 답을 찾기 어렵다. 완벽한 세상에서라면 정보의 중요성이 그 정보 전달자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쉽게 지루함을 느끼고, 인내심이 부족하며, 감정에 쉽게 지배당하고, 복잡한 정보가 마치 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이해하기 쉬워지기를 원한다. 비극은 우리에게 고통과 괴로움, 충격, 슬픔, 혐오감을 안겨 준다. 그러나 마법 같은 변화를 초래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똑같은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라도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잠재적 발휘 수준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가장 큰 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대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상황, 해결책 발견에 미래가 달려 있어서 빨리 행동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끼는 상황이다. 쇼퍼파이 창립자 토비 뤼트게는 말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아무 문제가 없을 때는 진정한 회복력을 키울 수 없다." 나심 탈레브는 말했다. "역경에 과잉 반응할 때 분출되는 엄청난 에너지가 혁신을 만들어낸다." 고통은 평화와 달리 우리의 집중력을 발휘시킨다. 늑장과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는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우리의 턱밑에 들이밀어 당장 그리고 모든 역량을 동원해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모든 측면'에서 완벽하도록 진화하는 종은 없다. 하나의 능력이나 특성이 완벽해지면 결국 생존에 필수적인 다른 능력이나 특성을 잃기 때문이다. 진화 논리는 자연 세계의 모든 종이 완벽하지는 않되 생존에 필요한 적당한 수준의 특성들을 갖게 만들어놓았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일이 될 수 있다.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는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는 비결은 항상 조금씩 덜 일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창의력을 발휘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공원을 거닐거나 소파에서 아무 생각 없이 빈둥거리는 시간이 대단히 중요할 수 있다. 알베르토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간을 내서 해변을 오래 산책한다.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다. 연구가 풀리지 않을 때는 방 안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머릿속 상태를 마음속에 시각적으로 그려본다." 찰리 멍거는 워런 버핏의 성공 비결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그는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그저 휴식을 취하며 책을 읽는 데 보냅니다." 버핏은 생각할 시간이 무척 많았다. 나심 탈레브는 "나는 성공의 유일한 지표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정확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큰 그림을 보여주는 원칙에 집중할 시간이 줄어든다. 정확성보다는 원칙이 더 중요할 가능성이 높음에도 말이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로렌스가 뜨거운 성냥불을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으로 잡아서 끈다. 그러자 그걸 지켜본 다른 사내가 똑같이 따라 했다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다. "뜨겁잖아요! 대체 어떻게 한 거죠?" 그가 묻는다. 그러자 로렌스가 대답한다. "뜨거워도 개의치 않는 거지." 이는 인생에 꼭 필요한 능력 중 하나다. 고통을 피해갈 쉬운 해결책이나 지름길부터 찾기보다는 필요한 때에 고통을 참아내는 능력 말이다. 우리는 빠르고 쉬운 길에 혹하기 쉽다. 고생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그런 길은 거의 없다. 찰리 멍거는 이렇게 말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누릴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간단하다. 이것은 황금률이다. 사람들에게 뭔가 제공할 때는 당신이 상대방이라 해도 만족할 만한 것을 제공하라." 목표로 삼을 가치가 있는 것 중에 공짜는 없다. 모든 것에는 비용이 따르며, 대개 그 비용은 잠재적 보상의 크기와 비례한다. 출처 책 불변의 법칙


2025-04-10 ⋯ 가혹한 현실과 확고한 믿음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돌아갈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은, 크리스마스가 왔다 지나가면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지곤 했다. 스톡데일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죽을 만큼 괴로워했다"고 한다. 스톡데일은 상황이 나아지고 성공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지니는 동시에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여아 한다고 말했다. '결국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크리스마스 때까지 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심리학자 로런 앨로이와 린 이본 에이브럼슨은 '우울한 현실주의'라는 인상적인 개념을 소개했다. 이는 우울한 사람이 삶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지에 관해 더 현실적인 감각을 지니기 때문에 세상을 더 정확하게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울한 현실주의의 반대는 '무지한 낙관론'이다. 무지한 낙관론에 빠진 많은 이들은 현실 파악은 불완전할지언정 긍정적인 감정상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런 긍정적 관점은 객관적 현실이 암울하고 도처에 비관주의가 가득할 때도 목표를 향해 계속 나아가게 해주는 연료가 된다. 스티븐 프레스필드는 30년 동안 글을 쓴 후에야 첫 책 <베가 번스의 전설>을 출간했다. 그전까지의 삶은 암울하기만 했다. 한때는 집세를 아끼기 위해 정신병원 퇴원자들이 사회로 복귀하기 전에 지내는 시설에서 살기도 했다. 언젠가 프레스필드는 이 시설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만나본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그들은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엉터리를 꿰뚫어 본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프레스필드는 "그들은 엉터리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들을 쓸모없는 불량품으로 여겼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세상의 엉터리 같은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천재였을 뿐이라고 프레스필드는 말했다. 비효율성이 사방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그것을 피할까?"가 아니다.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비효율성을 견디는 것이 최선일까?"라고 물어야 한다. 만일 그것을 견디는 능력이 '제로'라면, 즉 의견 충돌, 개인적 인센티브, 비효율적인 일, 의사소통 오류 같은 것들을 극도로 혐오한다면, 타인과의 교류나 협력이 필요한 일에서 성공할 확률도 제로에 가깝다. 프레스필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신은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없다. 그 반대, 즉 엉터리 같은 일이나 성가신 문제, 불편함을 무조건 참고 받아들이는 것 역시 나쁘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면 당신은 세상에 산 채로 잡아먹힐 것이다. 이렇듯 성가신 문제나 불편함을 얼마만큼 견디는 것이 최선인지 판단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이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였지만 하반신이 마비된 탓에 화장실에 갈 때도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다리를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오렌지주스를 먹고 싶지만 사람들이 우유를 가져다줄 때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 우유를 마실 줄 알아야 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얼마만큼의 비효율성과 불편함을 견뎌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책 불변의 법칙


2025-03-29 ⋯ 취약성

"기분이 최고로 좋았을 때를 10이라고 하면, 지금 기분은 1에서 10 중 몇 정도인가요?" 그녀는 조용히 내 답을 기다렸다. "6에서 7 정도요." 정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환자들에게 생각하지 말고 직감적으로 답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7'이란 건 내 솔직한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일반 환자 대신 상담 시간을 차지한 내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였을까? 난 내 우울증의 원인을 오랫동안 탐구했다. 어떤 힘든 일이 닥치면 며칠도 안 되어 극심한 절망에 빠지는 이유가 뭘까. 정신역동치료는 과거의 인간관계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통찰해보려는 쪽이다. 반면 인지행동치료는 현실을 자신에게 해로운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서' 우울해진다고 보고 그런 관점을 개선하려는 쪽이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 개인의 역사도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남에게 이야기하고 반복해 서술하는 과정에서 유기체처럼 변한다. 어느 시점에서건, 내가 '진짜' 아는 건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뿐이다. 1년 전 느꼈던 감정, 품었던 고민이 아무리 해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어쩌면 일부러 잊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지금의 나에 대해 내가 아는 이야기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다. 이 일을 하면서 배웠지만, 의사는 환자가 안고 있는 문제의 '이력을 알아내는' 데 그치지 말고 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에 몸만 다친 게 아니었다. 10대 시절 우울증을 앓았던 것도, 20대 중반인 지금 기분이 심하게 침체되어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는 성장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했지만, 어릴 때부터 앓았던 당뇨병이 합병증을 일으키면서 그간 노력해 얻은 것들을 다 잃게 되었다고 느꼈다. 어머니도 당뇨병이 있었다. 리처드는 최근 시력이 나빠졌고, 어린 시절 경험 때문에 우울증에도 대단히 취약해진 상태였다. 물론 충분히 이해는 된다. 그럴 수 있다. 당뇨병처럼 큰 병을 앓는 게 얼마나 힘들지도 짐작이 된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심각할 정도로 기분이 침체되지는 않는다. 알아서 살 길을 찾아나간다. 리처드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의사들이 가끔 하는 실수는, 환자가 현재 처한 상황에 비추어볼 때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이해할 만하다'고 넘겨짚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으면 누구든 기분이 처지는 게 당연하죠. 저라도 그러겠어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환자는 우울한 것일 수도 있다. 우울은 불행한 감정과는 다르다. 우울은 불행보다 훨씬 더 깊고 큰 절망감으로, 세상을 보는 눈에 색을 덧입히고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어렵게 만든다. 출발점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엉엉 울고 있었다. 아빠는 먼저 훌쩍 내렸다. 나와 일행이 아닌 척 하는 것 같았다. '이 울보 여자애 내 딸 아니야' 하고 말하는 듯했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아빠의 기질을 파악했다. 우리 둘은 여러모로 많이 닮았으면서도 또 달랐다. 나는 쉽게 불안해하고 겁이 많았지만, 아빠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힘이 세고 용감했다. "뭐가 문제야?" 아침마다 학교 가기 전에 티셔츠를 몇 번이나 입었다 벗었다 하는 앨런에게 나는 묻곤 했다. 엄마 아빠 둘 다 7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해서, 내가 두 남동생을 아침마다 준비시켜야 했다. 나보다 열한 살 어린 막내 이언은 골치를 썩이지 않았다. 알아서 시리얼을 우걱우걱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나의 일곱 살 터울인 앨런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늘 괴로워했다. "저리 가! 나 좀 가만 놔둬." 앨런이 소리쳤다. "왜 그러는 건데." 나는 이유를 말해달라고 구슬렸다. "주름이 너무 많아." 앨런은 중얼거리거나 울면서 외치곤 했다. "우리 늦었어." "상관없어! 나 좀 놔둬." 동생은 그렇게 옷과 씨름하다가 화를 못 이겨 옷을 갈가리 찢기도 했다. 밤에도 쉽지 않았다. 깜깜한 방에서 침대에 눕지도 않고 몇 시간을 서 있었다. 자기 전에 치러야 하는, 자신도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복잡한 절차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절망감에 빠졌다. "앨런, 제발 잠옷 좀 입어, 응?" "싫어." "여보, 이제 자정이야." 엄마가 문간에 서서 애걸했다. "그냥 놔둬. 서 있다가 알아서 불 끄고 자라고 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동생은 자기 침대 옆에 돌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 문이 꽝 닫혔고, 방 안에서는 흐느끼는 울음소리만 흘러나왔다. 결국 아빠도 포기하고, 실망과 분노로 피폐해진 채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앨런은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강박 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때는 병명을 몰랐지만, 아빠는 사회공포증이 점점 심해졌다. 구체적으로는 공공장소에서 남들과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가 살 만한 옷이나 신발 따위를 집에 가져가서 먼저 좀 입혀보겠다고 가게 주인에게 사정해야 했다. 심지어 아빠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오지도 못할 정도로 불안이 심했다. 술을 마시면 불안이 좀 가라앉긴 했지만 아빠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대신 담배를 하루에 40개비까지 피웠다. 부모님은 앨런과 함께 가족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아빠는 의사가 자기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며 질색했다. "뭘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죄책감만 잔뜩 주고." 의사가 나도 함께 오라고 했지만 나는 거부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난 학교 공부에 너무 바빴다. 당시엔 정신질환의 생물학적 근거라는 것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뇌의 배선 결함이 아닌 양육의 문제로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금은 유전과 양육 어느 한 쪽의 문제라기보다 둘이 복잡하게 얽힌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동생 앨런이 불안 장애 성향을 부모 양쪽에게서 물려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동생은 난산 끝에 태어났다. 생사의 갈림길을 걷던 몇 분 동안 심장박동이 잡히지 않았는데, 그때 경미한 저산소성 뇌 손상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크면서는 엄마 아빠를 애먹여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을 조성했고, 그로 인해 자신도 더 불안해졌다. 이는 옷 입기나 취침과 관련된 이상행동과 분노와 반항, 또다시 이상행동의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나는 유전적으로 신경증적 성향을 타고나기도 했지만, 안전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성장 터전을 가족에게서 제공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늘 괴로웠다. 아이가 자신 있게 세상에 부딪칠 줄 아는 사람으로 커나가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엄마는 불안이 있음에도 천성적으로 매사에 태도가 당당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아빠의 과묵한 내향성을 더 많이 물려받은 것 같다. 어릴 때 엄마보다 아빠와 훨씬 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애착은 10대 시절 점점 불안과 두려움으로 바뀌어갔다. 그러한 변화는 인생의 시련을 버티는 내 능력의 한계를 더욱 낮추는 구실을 했다. 나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점점 취약성이 높아졌다. 마음에 안드는 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 책상에서 볼펜을 떨어뜨려서 허리를 숙여야 하는 것, 침대에 누워서 과자를 먹고 봉지를 휴지통에 버리기 위해 팔을 뻗는 것, 문 밖의 누군가의 발소리를 듣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 큰 불행이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이 나에겐 견디기 힘든 큰 불행처럼 느껴졌다. 어제는 밤에 불행해서 죽고싶어서 울었다. 그 이유는 엄마 아빠와 평생 함께 있고 싶은데 미래의 어느 날은 죽을 것임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한참 울은 뒤에 나는 한 가지 처방을 내리고 마음이 편안해져서 잠이 들었다. 내가 내린 처방은 엄마 아빠가 죽을 때 같이 죽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언제 어린애처럼 울었냐는듯이 나는 짐을 챙겨 할일을 하러 집을 나섰다. 출근 전 카페에 와서 읽고 싶던 책도 읽고 맛있는 커피도 마셨다. 기분이 최고로 좋았을 때를 10이라고 하면, 지금 기분은 1에서 10 중 몇 정도인가요? 같은 질문에 7 같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사실 알고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죽는다고 해서 죽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제 죽고싶어 울었던 것은 엄마 아빠가 나보다 일찍 죽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큰 불행이지만 그 사건이 갖는 '시간'이라는 특성 때문에 지금의 나에겐 불행의 본질적 크기에 비해 그만한 영향을 주지 못한다. 사실 어제 불행해서 죽고싶어서 울었던 이유는 미팅에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기 때문이다. 의아한 점은 그 피드백을 온전히 이해했으며 더 안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던 상황을 성공적으로 회피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피드백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작은 불행 하나가 내 안의 기폭제를 밀었고 벼랑을 구르며 점점 커졌으며 우울한 감정이 발생했다. 만약 덧입혀질 불행이 없다면 그대로 축적되어 다음 발생할 우울을 조금 당길 예정이었으나, 어제는 먼 미래의 불행이 떠오름에 따라 감정이 덧입혀져 발현될 수 있었으며 그렇기에 나는 죽을 듯이 울었던 것이다. 출처 책 당신의 특별한 우울


2025-03-20 ⋯ 수용

지금까지 의사로 일하면서, 인생 계획을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 사람은 자녀들 인생까지도 그런 식으로 계획하려고 한다. 그리 생각하는 게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살면서 정말 나쁜 일을 당해본 적이 한 번도 없고 모든 일이 기대한 대로 풀린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다가 상실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이 본인의 자아정체감이나 인생의 이정표와 관련이 클수록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어진다. 나는 시험에 떨어지면서 계획이 일시적으로 틀어졌다. 주도면밀하게 그려놓았던 인생 계획이 어그러졌다. 누가 만들어준 계획은 분명히 아니었다. 오로지 내 생각만으로 만든 계획이라고 믿었다. 나도 어쩌면 대니얼처럼, 아버지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게다가 이미 돌아가시고 세상에 있지도 않은 아버지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계속 나타나고 있던 균열을 적당히 땜질만 하며 수습하고 있었다. 그때는 길을 잠깐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고만 생각했고,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정말 필요했던 약은, 운명이라 생각했던 길에서 완전히 탈선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후에 깨달았지만, 삶이라는 열차가 탈선하여 내달리는 그 혼돈의 순간에는 때로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앞으로 무엇을 바꾸면서 살아야 할지, 너무 늦기 전에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다. 그런 의문에 답할 수 있다면,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이 스스로 정한 목표는 이룰 가능성도 더 높은 법이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나는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모든 결점과 허물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심리치료사들은 자기애에 대해 이야기한다. 간혹 자기애를 이기심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둘은 다르다.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진정으로 남을 아껴줄 수 있으려면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백 번 틀리지 않다. 자신만의 장점을 인정하고, 단점을 시인하고, 받아들이며, 그 모든 것을 평온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미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온 선택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차츰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선택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건 물론 아니었다. 특히 연애에 성급히 빠져드는 문제는 고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듯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 결혼 생활의 부족한 점을 직시하지 못했던 건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차츰 깨달았다. 내 삶도 정서적으로 '보류된' 상태였던 것이다. 미래가 뒤로 미루어진 상태였다. 나는 물방앗간 집 옆 바위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제니퍼를 생각했다. 바람에 이는 파도의 물보라, 바다 건너편에 수면과 맞닿아 있는 자줏빛 산들, 넋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외로움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안다. 그것은 남은 평생을 혼자 살게 되리라는 두려움이었다. 아침에 옆에서 자는 연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눈을 뜰 일이 없게 되리라는 두려움이었다. 이제 저녁 식탁에서 내가 정치인들이 의료제도를 개악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릴 때 공감해줄 사람도, 나를 안아주면서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서 식기 전에 먹으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으리라는 두려움이었다. 고독사가 두려웠다. 혼자 사는 할머니가 집 주방에서 몇 주 만에 발견되었는데 '자연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배고픈 고양이들이 물어뜯어서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 수 없다는 따위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가 아닐 것 같았다. 내 환자들이 많이 그랬듯, 나도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될까봐 두려웠다. 고립, 외로움, 우울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람들과 떨어지면 그로 인해 우울해질 수 있고 회복 또한 더뎌질 수 있다. 문제는 우울해지면 남들과 대화하기도, 함께 있기도 힘들고 남들을 믿지도 못하니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고립시키곤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고립이 심해지고 그에 따라 기분이 더 가라앉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럴 때는 단순히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이 꼭 해결책이라고도 볼 수 없다. 천성이 사교적인 사람은 다시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상대적으로 크지만, 내향적인 사람은 상호작용 과다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회복하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내 경우도 물론 후자 쪽이다. 우울한 사람은 세상 속에 나가 남들과 어울린다는 것에 대단히 양면적인 감정을 갖기 쉽다. 숙소 밖에 앉아 주변 경관을 응시하면서, 혼자라는 두려움과 맞닥뜨릴 방법을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끌어안고 견뎌내고, 이해해야 할지 조금씩 깨달았다. 글을 읽거나 쓰거나 창작하는 등의 활동을 하려면 꼭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라는 책에서 창작을 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혼자 있는 능력이야말로 그 사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징표이며, 모든 사람이 인간관계를 훌륭하게 영위해야만 삶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불교의 사상과 수행에서 유래한 '마음챙김'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내면의 자아를 좀 더 잘 알기 위해, 괴로운 생각을 억누르려 하지 말고 그대로 관찰하면서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마음챙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그날그날 반복되는 일과에 집중하다 보니 -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3킬로미터 거리의 가게를 걸어서 다녀오고, 창가 책상에 앉아 독서하고 글 쓰고, 바다 풍경을 스케치하고 하면서 - 나도 모르게 마음챙김 기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혼자라는 게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많은 사람이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남들과 어울리면서 감정을 나누고 걱정과 근심을 터놓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지 못한다면 제니퍼처럼 우울해지고, 또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고독이라는 것 역시 끌어안을 수 있고, 심지어 즐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법을 배운다면 가능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내가 남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친밀과 고독 사이에서 누구나 각자의 이상적인 균형점을 찾아내야 한다. 나는 마지못해 그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했지만, 그런 공포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힐 때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가끔 기분이 가라앉고 몸이 녹초일 때는, 무거운 추가 가슴을 짓눌러 몸을 옴싹달싹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존의 말이 맞았다. 그럴 때 나는 정말로 통제력을 잃고 현실을 벗어나 버리는 듯 했다. 대개는 잠깐이었지만, 그럴 때면 자살 충동도 다시 느껴졌다. 나는 엘리자베스 워첼이 '프로작 네이션'이라는 책에서 묘사한, 끝없는 정서적 혼돈 상태가 무엇을 말하는지 너무나 잘 안다. 내가 특히 공감한 부분은, 저자가 원하는 치료사란, 어른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 그리고 우울증이 심해 전화 요금도 내지 못하는 이용자의 사정 따위는 전화 회사가 신경쓰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갈 방법을 알려줄 사람이라고 한 대목이었다. "지금 어머니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이세요?" 내가 물었다. "제 어머니예요. 그러니까 물론 사랑하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밉기도 해요. 정말, 진짜 미워요." 그리고 나를 보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제가 어떻게 그런 나쁜 말을... 신부님에게 고해성사해야 할 것 같아요." "아니요, 전혀 나쁜 말 같지 않은데요. 본인의 감정인 걸요. 이제 그 감정을 안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봐야죠." 세상에 단일한 진실이란 없다. 저마다 몇 개의 안경 너머로 각자의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을 뿐이다. 남들의 기억과 인식과 가치관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람은 자기 필요에 맞는 진실을 만들어간다. 좋건 나쁘건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스토리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일기를 쓰면서,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만들어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과거를 조금씩 되돌아볼 수 있고, 과거가 어떻게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는지 차츰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는, 지금도 우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과거의 횡포에 맞서 그 힘을 무력화할 수 있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 존과 함께 다시 찾은 그곳은, 회청색 갈매나무와 가시금작화 수풀 사이로 새로 깔린 판잣길이 모래언덕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침내 깨끗한 모래사장에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에 이르자, 나는 워시만의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차갑지만 상쾌했다. 어찌 보면 모질고 변덕스러운 바다였지만 나는 이곳에 오면 늘 기분이 새로웠다. 아이 때도 10대 때도 여름날 저녁이면 아빠와 함께 자주 와서, 바다에서 수영하는 아빠를 지켜보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때의 장면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빠가 항상 저 모래언덕에 앉았어." 내가 존에게 외쳤다. "아빠가 여기를 정말 좋아했어. 수영을 워낙 잘했거든." 힘차게 바다로 헤엄치던 아빠의 검게 탄 어깨가 떠올랐다. 그때는 아빠와 함께 있으면 무척 안전하게 느껴졌다. 아빠가 너무 좋았다. 잠시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는 바다 저쪽, 아빠가 좋아했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힘찬 모습으로 살아서, 검게 탄 긴 팔을 석양에 번들거리며 나를 향해 흔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물에 들어가더니 거센 물살을 헤치며 나를 향해 헤엄쳐왔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랫동안 아버지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아버지를 그리워할 것이다. 애통해한다는 것은, 놓아주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애통해할 수 있게 되면 잃어버린 사람을 그 사람 그대로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이상화된 성자도, 분노와 실망을 쏟아부을 표적도 아닌, 복잡하고 현실적이면서도 매우 인간적인 존재로. 내가 가진 아빠 사진은 한 장 뿐이다. 내가 집을 떠나 대학에 가기 얼마 전에 찍은 사진이다. 아빠는 구겨진 셔츠 차림으로 서서 한 팔을 엄마 어깨에 두르고 있고, 엄마는 아빠 손을 꼭 잡아 허리에 붙인 모습이다. 나는 아빠 왼쪽으로 살짝 뒤에 서서 해를 쏘아보고 있고, 동생 이언은 우리 앞에 서 있다. 앨런은 아마 카메라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는 마치 우리가 모르고 있는 비밀을 알고 있기라도 한듯 묘한 미소를 엷게 짓고 있다. 엄마는 방금 전까지 다들 싸우기라도 한 듯 억지스러운 미소를 활짝 짓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진도 점점 빛이 바래 흑백에 가까워져가고, 내 애통한 마음도 흐릿해져간다. 지금은 알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은 결국 아빠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아빠는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내게 변치 않는 사랑의 힘을 가르쳐주었고, 내가 지금 모습이 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중요한 건 애통한 마음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상실의 기억을 떠올릴 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괴롭고 아픔이 생생하다면 진전이 없는 것이다. 감정이 잦아들지 않고 점점 커진다면 그 역시 심각한 신호다. 애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우울증이 된다. 애통한 마음의 크기를 1에서 10까지의 숫자로 생각해볼 때 그날그날 아주 미미하게라도 줄어들고 있따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신호다. 조금씩 다시 일상을 마주하고 앞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지나간 일을 조금씩 손에서 놓아가는 것이다. 출처 책 당신의 특별한 우울


2025-02-21 ⋯ 예측

시간과 공간은 고정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며, 서로 독립적인 것도 아니다. 우주를 이해하려면 이들을 합쳐서 4차원, 즉 공간을 나타내는 세 축과 시간을 나타내는 한 축으로 시각화해야 한다. 호킹 박사는 '시공(spacetime)' 이라는 개념을 시각화할 때 광원뿔(light cone) 이미지를 활용해 과거와 미래의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주었다. 빛은 발산될 때 연못의 물결처럼 퍼져나가면서 원뿔 형태를 형성한다.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것은 없으므로 (과거에) 기여하거나 (미래에서) 시작된 현재 순간의 모든 사건은 이 원뿔 안에서 빛의 속도나 그보다 느린 속도로 일어나야만 한다. 호킹은 원뿔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 사건들은 현재를 바꿀 수 없고 현재에 의해 바뀔 수도 없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호킹은 어느 날 갑자기 태양이 죽는다는 시나리오를 얘기했다. 이 사건은 과거의 광원뿔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착하려면 8분이 걸리기 때문에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오직 이 지점에서만, 미래의 광원뿔까지의 어느 정도 거리에서만 이 사건이 우리의 현실과 교차하고 현실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가 아니라 우리으 ㅣ의식을 가로지르기 시작한 순간에 그 사실을 인정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배우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바꿀 방법을 찾는다. 우리는 확실성을 원하지만 기회도 원한다. 미래가 안전하다고 느끼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가능성에 고무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한다. 우리는 목표를 설정하고, 판단에 따른 결정을 내리고, 우선순위를 미세하게 조정하는 더 나은 방법을 바란다. 미래를 효율적으로 계획할 도구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도 필요하다. 다행히 이런 질문은 잠들지 못해 깨어있는 밤이나, 올해 목표와 다짐을 적는 새해 아침에만 고민하는 질문이 아니다. 이론물리학은 우리를 위해 어려운 부분을 상당히 많이 해결했다. 이론물리학은 삶의 사건을 시각화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계획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는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심지어 더 좋은 점은 내가 여덟 살의 나를 안심시켰듯이, 이론물리학이 알려주는 방법은 이진법 모델과 냉혹한 광원뿔의 경계선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소개할 개념인 네트워크이론, 토폴로지, 경사하강법을 활용하면 인간만큼이나 유연하고 변하기 쉬운 삶을 계획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아마도 삶의 계획과 목표를 세울 때 마주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에 집중할까?'일 것이다. 현재와 미래, 어느 쪽에 집중해야 할까? 지금 느낄 만족감인가, 아니면 뒤로 미룰 기쁨인가? 끊임없이 장기 계획을 세우느라 현재의 삶을 즐기지 못하는가? 아니면 현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을까? 현재에도 행복하고 미래도 이상적으로 계획할 수 있을까? 이 딜레마를 두고 너무 고심하느라 걱정한 적이 있다면, 양자역학이 당신을 안심시켜줄 것이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아는 한 가장 작은 입자인 아원자입자(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를 연구하는 이론물리학의 한 분야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아원자입자의 위치를 더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입자의 운동량을 측정하기는 더 어려워진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역의 명제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물리학은 우리에게 위치와 운동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말해준다. 한쪽에 집중할수록 다른 쪽의 측정은 부정확해진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가?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입자에 관해 썼겠지만, 같은 원리가 거시 세계인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되는 듯하다. 정밀 측정 장비에도 한계가 있듯이, 집중하고 우선순위를 매기는 우리의 능력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파티를 주최하는 동시에 파티를 즐길 수는 없다. 파티에 대해 고민하든지 파티를 즐기든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든지 다른 사람은 어떤지 걱정하든지 둘 중 하나다. 하나를 하면 다른 하나를 하는 능력이 억제된다. 특히 나처럼 '재미있게 노는 법'을 준비하려고 구글에 검색해야 한다몀ㄴ 말이다. 이는 성인의 딜레마로, 우리는 끊임없이 모순되는 두 개의 욕구를 인식한다. 현재를 즐기거나, 미래를 계획하거나. 동시에 두 가지 모두 챙기려는 욕망은 둘 중 하나를 적절하게 성취할 능력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이 다가올지 걱정하느라 현재를 즐기지 못하거나, 너무나 즐겁게 지내느라 미래를 대비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정보 중심의 연구에 기반을 둔 삶을 즐기는 나조차, 그저 배움을 멈추고 세계에 무지한 채 행복에 젖어 진실로 순간을 살아가는 아이로 되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아빠와 부엌에서 생선을 요리하거나 정원에서 놀고, 마음 가는 대로 수많은 모래성을 만들고, 멋지고 다채로운 색상의 수영복을 입은 채 루 해변의 '밀리의 바위'에 앉아있기도 했다. 일곱 살에는 체크무늬를 좋아했고, 엄마의 푸른색 덴마크산 그릇으로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거나 나를 두근거리게 하는 남성과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좋아했다. 물론 그 남성은 스티븐 호킹이었다. 모든 기억의 색, 맛, 냄새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내 마음에 남아있다.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했던 시절, 즐거운 삶이었다. 온갖 취미가 뒤섞인 이 주머니는 무작위였을 수도 있고 일정한 형태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모두 과거의 광원뿔을 형성하는 일부로서 지금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왔다. 내 흥미와 독자성, 개성을 강화하는 경험의 축적이다. 이 기억들은 대세에서 나만 소외되리라는 두려움이나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걱정이 없었던 때를 상기시킨다.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던 나는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파동을 연구하는 또 다른 양자역학 분야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는 전통적인 하이젠베르크 문제, 즉 특정 순간에는 파동의 운동량이나 파동의 위치 둘 중 하나만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다는 문제를 가리킨다. 양손 손가락을 동시에 마주 대려 해보라. 자꾸 어긋나서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확률파동(wave packet)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확률파동은 수많은 다양한 파동을 합성해서 시각화한 것으로, 과학자들은 파동들이 나타내는 총체적 행동을 연구한다. 하나의 파동은 분명하게 정의하기 힘들지만, 여러 파동 '뭉치(packet)'은 더 효율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목표를 설정하고 삶의 계획을 세우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하나하나의 결정이나 목표가 올바른지 알기 힘들다. 이럴 때는 큰 그림과 맥락, 즉 전체 '뭉치'를 살펴야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미래 전체의 최상의 결과와 비교해서 우리가 가능한 최고의 선택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가상의 확률파동을 만들면서 나는 삶을 숙고하는 두 가지 사고방식이 이루는 또 다른 균형에 부딪혀야 했다. 모멘텀 사고(momentom thinking)는 시간에 따라 살면서 한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옮겨 가도록 하며, 이 사고에 따르면 행복은 우리가 성취하고 계획한 것으로 정의된다(즉, 책임이라는 어른의 세계다). 반면, 포지션 사고(position thinking)는 현재를 살면서 현재 순간과 현재가 주는 느낌에 사로잡혀 다른 모든 것을 차단하고 그저 존재하게 하는데, 여기에는 죄책감까지 따른다. 포지션 사고를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데, 그것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되려면 해야 한다고 들어왔던 것과 완전히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꼭 필요하다. 가만히 서 있다고 해서 멈춰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더 창의적이고, 현재 거치는 과정을 재평가하며, 감각의 힘을 통해 살아가고, 미래를 위해 더 많은 가능성을 탐색한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집착하고 거의 모든 삶의 순간에 끼어들며 현재 이 순간의 즐거움을 부정하는 모멘텀 사고의 연결 고리를 끊을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명확한 미래에 대하 ㄴ끊임없는 욕구를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순간을 살아가는 능력을 회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2013년, 변화가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시기인 사순절(부활절 전 40일 동안의 기간. 단식을 하기도 한다) 직전에 특별한 팬케이크 한 접시를 먹으며 실험을 개시했다. 완벽하고 엄격하게 해야 할 일을 확인하고 모든 우선 사항을 처리했다. 나머지 절반은 포지션 사고를 하며 살았다. 모든 순간을 즐기고 미래에 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제 당신은 아마 이 계획이 잘되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할 만큼은 나를 잘 알 것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지극히 중요하지만 실패한 또 하나의 실험이었다. 실험하면서도 현재의 즐거움이든 미래의 명확성이든, 실험을 침식하는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파티를 열고도 파티가 끝난 후 해야 할 설거지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관찰자가 근본적으로 결과에 영향을 미치고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또 다른 양자역학 교리, 즉 관찰자 효과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드는 예시로는 현미경으로 전자를 관찰하는 사례가 있다. 관찰자가 광자를 투사하는 데 의존하면 이 행위가 광자의 운동 방향을 바꿀 것이다. 이처럼 내가 내 실험을 관찰하는 행위는 당연히 결과를 왜곡했다. 나는 무엇을 빠뜨렸는지 생각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 순간의 나를 즐길 수 없었다. 실패한 실험 덕분에 나는 포지션 사고와 모멘텀 사고, 현재와 미래 사이의 어디쯤에서 타협할 수 있었다. 평범한 날의 각기 다른 순간에, 나는 바로 그 특정 순간에 내게 가장 필요한 사고로 전환되기를 바라면서 두 사고 사이를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원하며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ADHD와 싸우면서, 현재를 사는 것과 미래를 계획하는 것 사이에서 적당히 춤출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알기만 해도 올바른 균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 내가 발견했듯이 이 둘을 완벽하게 구분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그저 이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지금 하지 않는 일을 할 시간이 나중에 있을 것이며, 오후에 햇볕을 쬐면서, 혹은 모두가 밖에서 즐기는 동안 안에서 계획을 세우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깨달으면, 우리가 하지 않는 일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것과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두 사고방식이 정확히 맞물리게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시각화할 방법도 필요하다. 그러면 목표를 설정하는 방법을 명확하게 선택하고 우리의 여행 속도에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내 삶에서 가장 신뢰하는 동맹인 네트워크이론이 진가를 발휘한다. *사실 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님. 나도 계획은 항상 어그러지는 쪽이었다. a와 b중 a 로 방향을 틀자마자 세상은 b 방향으로 휘어진다. 왜일까? a를 선택하자마자 갑자기 세상에서 a에 대한 반례가 속출하고 다시 양 갈래 길로 돌아오게 된다. 관찰자 효과였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를 읽은 후, 나는 광원뿔의 고정된 경계선보다 내 요구를 더 잘 충족해줄 예측 모델을 찾아 헤맸다. 나는 전통적인 인간의 모순, 즉 확실성에 대한 욕구와 정해진 한계에 대한 좌절감의 모순에 사로잡혔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을 제외하면 내게 주어진 계획의 한계만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없다. 이런 두꺼운 직선을 필요에 따라 구부리고 주변을 탐색할 구불구불한 선으로 바꾸려면 유연성이 필요하다. 나는 집을 나서는 데만 다섯 시간이 걸리는 끝없는 준비의 필요성과, 오랜 시간 신중하게 생각해 온 것을 극심한 조바심이 폭발하는 순간 모두 파기해버리는 성향, 두 가지 픅면 모두를 고려한 계획법이 필요했다. 이런 성향은 일종의 심리적인 뇌 정지 상태로, 오늘 하루가 레몬 셔벗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더 비슷해지는 것과 같다. 현재와 미래를 조화시키려는 나의 하이젠베르크식 전투는, ADHD의 시간 왜곡과 나를 계속 바닥으로 짓누르는 정신 가속기 덕분에 더 치열해진다. 이 모든 것을 처리하는 데 네트워크이론이 나의 구원자가 되었다. 이 이론은 상당히 단순한 개념이다. 연결된 대상을 그래프로 나타내고, 총체적으로 형성되는 네트워크를 시각화하며, 이런 연결성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무엇인지 연구한다. 네트워크이론과 그래프 이론이라는 연관된 기술을 이용해서, 우리는 복잡하고 밀접하며 동적인 계를 분석할 수 있다. 네트워크는 대상이나 사람들이 연결된 연속체다. 당신과 친구, 이웃은 여러 사회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런던 지하철은 서로 다른 노선으로 연결된 정거장 네트워크다. 토스터 플러그 속에 든 전기회로도 네트워크다. 와이파이와 무선 근거리통신망 일부에 연결된 채 여러분 옆에 놓여 있을 스마트폰은 아마 현재 네트워크의 일부일 것이다. 인터넷은 그 자체가 물리적으로나 무선으로 연결된 컴퓨터들의 메가 네트워크로, 그를 통해 방대한 양의 자료가 움직인다. 물질세계에서 디지털 세계까지, 사회에서 과학까지, 네트워크는 어디에나 있다. 네트워크는 무형이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구조이며, 우리가 수십 년에 걸쳐 경력을 쌓는 과정부터 지금 우리가 인터넷에 연결되는 방법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네트워크는 장기간 및 단기간의 삶을 계획하고 시각화하는 이상적인 방법을 제공하기도 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에 영향받으며 사방으로 밀고 밀리므로, 미리 계획을 세우는 투두 리스트보다 더 복잡하고 반복적이며 적용하기 쉬운 모델이 필요하다. 네트워크이론이 바로 이것을 제공하며, 특히 토폴로지는 네트워크 구성 요소인 노드(node, 컴퓨터과학의 기초 단위. 보통 네트워크에 연결된 하나의 기기를 뜻한다)가 연결되는 방식과 형성되는 구조를 알려준다. 토폴로지(네트워크의 요소들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방식)는 경직된 직선을 유동성 있는 가능성의 네트워크로 바꿔준다. 어둠 속에 감춰진 것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고, 정점에 이른 내 불안을 느슨하게 풀어준다. 한때는 유용했던 원리가 더는 쓸모없을 때나, 싹트는 생각이 이제 번성할 준비가 되었을 때를 알아차리게 돕기도 한다. 토폴로지의 본질은 매우 중요하다. 여섯 개의 단추로 패턴을 만들 때, 당신은 선이나 원, V자를 만들 수 있다. 토폴로지는 네트워크의 기능, 즉 역량과 한계를 결정한다. 우리가 살면서 의사 결정을 하고 우선순위를 설정할 때도 똑같은 일을 한다. 즉, 단기간 및 장기간의 결과를 결정할 유용한 증거와 선택을 패턴으로 배열한다. 미래의 삶을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생각해보면 이 네트워크의 노드는 사람부터 희망, 두려움, 목표까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발견한 계획법 중에서 너무 단순하지도, 불편할 정도로 제한적이지도 않은 최고의 방법이다. 역동적으로 당신의 환경이 그렇듯 적응력이 있어서 유용하다. 게다가 무엇이 정말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알 수 있도록 도와주므로 명확하다. 또 연결성에 초점을 맞추므로, 연결된 노드를 확인하여 어떤 노드가 영향을 주고받는지 살피며 특정 경로가 어디로 이어질지 알려준다. 네트워크는 호킹이 알려준 대로 시간과 공간의 맥락에서 광원뿔의 궤도에 한정되지 않고 생각하게 해준다. 또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이중 캔버스에서 사람, 특정 목표, 삶의 단계 사이의 근접성과 거리를 탐색하게 돕는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지, 그 사건이 일어나게 하려면 언제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호킹의 다이어그램에 선이 존재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소음에서 신호를 찾아내고, 길이나 자기 삶을 잃을 것 같은 불안을 극복하려면 우리에게 방향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트워크는 이런 직선을 구불구불한 선으로 부드럽게 바꾸며, 시간이 흐르면서 고정된 광원뿔을 다른 면이 빛에 노출되도록 스스로 접히고 돌돌 말리는 잎사귀 모양으로 바꾼다. 우리에게 구조를, 따라갈 길을, 유연성 있는 움직임을 준다**. 시간과 공간에 걸쳐서 네트워크를 만들 때 필요한 능력, 즉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현재에 대한 과도한 불안을 피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 목표 목록 자체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목록에는 맥락이 없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도 없으며, 선호도를 설정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선형성에는 적절할 수 있지만 의사 결정에는 목표와 함께 사람과 장소를 계획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며, 이 네트워크는 특정 형태를 고수할 필요 없이 오직 당신의 의도에만 맞으면 된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우리가 자신의 토폴로지를 친구나 동료의 것과 비교하면서 불안해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을 거라고, 갖고 싶은 것과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궁금해하지 않을 거라고, 대열의 끝으로 밀려날 것을 걱정하지 않을 거라고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네트워크이론은 당신을 자신만 뒤쳐지거나 소외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구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당신이 유연하게 형태를 만들어나가면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할 방향과 목적은 알려줄 수 있다. 일단 네트워크를 만들었다면 탐색을 시작해서, 대량의 정보와 구성 요소 중에서 어떤 것이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는지 알아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최적의 경로를 발견하고 발전시켜서, 상황이 바뀔 때마다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을 계속 뒤섞을 수 있을까?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기준이 필요하다.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들은 선으로 정해두기.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규정하지 않고 존재하는 그대로 건드리지 말고 두기. 그 상태 그대로도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려면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들이 선명하게 배경을 형성해줘야한다. **열심히 생각해서 가장 적절한 해를 내놓는 식을 통해 결과를 내야 하는 일이 있고, "결정" 방법을 "식" 같은게 아니라 그 사안만의 결정하는 방법대로 두고 어느순간 결정할만큼 선명해졌을때, 그 시점이 정답이라고 믿고 그 시점에서의 위치를 결과로 내야하는일도 있고. 그런것같네 경사하강법은 머신러닝에서 가장 기본적인 기술의 하나이며, 삶의 네트워크를 탐색하는 우리 모두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는 개념이다. 첫 번째 교훈은 우리는 경로 전체를 미리 볼 수 없으며, 심지어 대부분을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노드를 연결하고 군집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결국 길을 따라 아래로, 즉 미래로 갈수록 우리의 시야는 흐릿해진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경사하강법의 두 번째 교훈은 현재의 전후 사정이 당신이 지금 당장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결정 과정에서 경사도를 시험하듯이, 우리도 우리만의 기준에 따라 특정 경로의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이 길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는가, 성취감이 더 큰가, 더 의미 있는가?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여행의 방향을 시험해보고 삶의 비용함수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여기서 가치와 목적에 대한 감각을 개발하고, 매슬로의 욕구 단계의 상층을 충족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는 일단 음식과 쉼터처럼 가장 기본적인 인간 욕구를 충족하면 우리의 관심은 더 덧없는 문제, 즉 성취감을 느끼고 존경받고 문제를 해결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같은 것으로 이동한다고 말한다. 만약 그 방향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즉 경사도가 차츰 감소하면 당신의 모멘텀도 줄어들면서 침체되거나 멍해지거나 그저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변화하게 된다.* 경사하강법 알고리즘은 선택에 한해서는 감상적이지 않다. 만약 가장 가파른 하강 경로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기꺼이 두 단계 뒤로 물러난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도 경로를 선택하고 적응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며, 언제든 목표와 행복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면 경로를 바꿔야 한다.** 또한 곧고 완벽하고 유일한 길은 없으며, 다만 발견해서 따라가기까지 기꺼움, 흥미,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길만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선택하는 최고의 경로는 항상 객관적인 안정성 보다는 여러 요인에 좌우될 것이다. 이는 선택 사항을 탐색할 시간이 얼마나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어느 정도의 완벽주의자인가에 달렸다.*** 목표를 설정하고 추구하는 일은 두려울 수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스포츠인 암벽 등반처럼 이것도 그저 적절한 장비와 개인의 노력 문제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에게 빌레이(암벽 등반에서 등반자의 추락을 방지하기 위한 로프 조작 기술)를, 네트워크이론은 밧줄을, 경사하강법은 경로를 제공한다. *학습에서 멈춰야할 지점은 어디일까? 학습의 목표가 되는 적용 분야에의 적합성보다는 학습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할 것이다. 그 말은? 너무 정확해지면. 또는 너무 어디서 본것같아지면. 그럼 학습을 멈추고 남은 역량은 어디에 써야하는가? 목표에 안전하게 도착하는데 써야한다. 역량은 조금 남아야 제대로 분배한거다. **그리디 알고리즘의 반대 발명하면 좋을듯. 대인배 알고리즘: 너무 멀어질때만 수정하면됨. ***"동전 던지기 결과"를 예측하기 위한 학습을 수행한다고 하자. 1/2 라는 답보다 아주 적절한 양의 적은 오차를 넣는게 정답에 더 가까울 때도 있을 것이다. 아닐 때도 있ㅇ르 것이다. 고장난 시계가 하루에 두번 맞듯이. 그렇다고 해서 "동전"이 앞면과 뒷면 말고 다른 면을 갖고있는 것은 아니다. 동전은 정확히 앞면과 뒷면만 존재하며 1을 둘에 할당하면 (미묘한 무게차이 같은걸 신경쓰지 않으면) 1/2 를 할당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상식적으로) 억지이다. 하지만 10번 던졌을때 정확히 5번이 나오는가 하면, 10번 던지기를 10번 해보면 5번이 나오는 게 더 적을 것이다. 목적을 확실히 해야한다. "동전"의 특성을 알아내는 것인가? 아니면 "동전 던지기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인가? "동전"의 특성을 알아내는게 목적이라면 10번을 10번 한 뒤 smoothing을 해서 1/2 로 결정하면 된다. "동전 던지기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더 정확히는 "동전 던지기 결과를 누구보다 가장 정확히 맞히는것" 이 목적이며 다른 결과는 무의미하다면, 1/2에 난수를 더하는게 목적에는 더 부합할지 모른다. 예측이란 그런것.. 출처 책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2025-02-18 ⋯ 상자와 지도

더 나은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해, 정보에 접근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더 체계화할 필요는 없다. 머신러닝이 우리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지만 사실 그 반대다. 알고리즘은 복잡성과 무작위성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며, 환경의 변화에 효율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단순한 패턴을 추구하는 경향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나타난다. 기계는 복잡한 현실을 전체적인 데이터 집합의 또 다른 일부로 여겨 단순하게 접근하는 데 반해, 정작 그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다. 단순하거나 직접적이지 않은 대상을 더 복잡한 방식으로 사고하는 통찰력과 자발성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비지도 학습 머신러닝 중 클러스터링은 데이터를 A, B, C로 분류하려는 선입견 없이 "공통점"을 기준으로 분류한다. 미리 정한 결론에 꿰맞추기보다 데이터 자체가 말해주기를 바랄 때 특히 유용하다. 상자는 유용한 증거와 대안을 모아 정돈된 형태로 만든 것이다. 상자 속 사고방식은 깔끔하기 때문에 선택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나무는 유기적으로 자란다. 나무는 우리를 사방으로 이끌 수 있고, 그중 상당수는 의사 결정의 막다른 길이나 완벽한 미궁으로 밝혀진다. 그러면 어느 쪽이 나을까? 상자, 아니면 나무? 정답은 '둘 다 필요하다'이다. 상자 속에서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나는 내 주변 세상과 사람들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내가 더 많은 데이터를 모을수록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모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방법이 없었기에 쓸모없는 잡동사니로 가득 찬 상자만 점점 늘어났다. 나는 이 과정 때문에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때로는 몸을 어느 각도로 유지해야 하는지에 집중하느라 침대에서 벗어날 때조차 고군분투 해야했다. 물론 분류는 강력한 도구이며 어떤 옷을 입을지, 무슨 영화를 볼지 같은 문제에서 즉각적으로 결정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정보를 처리하고 해석하며, 미래를 알기 위해 과거의 증거를 이용해서 까다로운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심각하게 억압한다. 우리는 모두 모순과 불가측성, 무작위성을 헤쳐나간다. 이들은 삶을 현실로 만드는 요소다. 우리는 둘 이상의 선택지 중에서 골라야 하며, 고려해야 할 증거들은 파일로 정리되어있지 않다. 깔끔한 상자 모서리는 든든하지만 환상일 뿐이다. 현실의 그 무엇도 그렇게 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자는 고정되어 있고 휘어지지도 않지만, 우리의 삶은 역동적이며 계속 변한다. 좋은 의사 결정은 보통 확실성을 가정하는 데서 나오지 않으며 혼돈, 다른 말로는 증거라는 것에서 나온다. 의사 결정을 둘러싼 데이터 집합을 충분히 깊이 탐색하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과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다양한 의사 결정으로 이어지는 나뭇가지가 일제히 닫히거나 열리지 않는다면 사실상 눈가리개를 한 채 선택하는 셈이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만, 데이터 포인트를 충분히 수집하고 가능성이 큰 계획을 구상하면 대부분 상황에서 제대로 된 지도를 손에 쥘 수 있다. 관행이나 미리 정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증거가 의사결정을 이끌 것이고, 다양한 결과와 각 결과가 미치는 영향을 스스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책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2025-01-30 ⋯ 혼돈과 관점

나는 그에게 통쾌하게 반박해줄 말이 있었으면 싶었다. 우리는 중요하다고, 우리는 사실 아주 중요하다고 말해줄 방법. 그러나 주먹이 올라가는 게 느껴지자마자 내 뇌가 주먹을 다시 잡아당겼다.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정확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점이 내가 우생학자들에 대해 그토록 격노하는 이유다. 그들은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 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분기학자들이 등장하던 시기에 "수리분류학"이라는 방법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는 컴퓨터가 그 무지막지한 계산 능력으로 진화적 친연성을 판단해줄 거라는 희망에 기초한 방법이다. 종들을 비교할 때 생각해낼 수 있는 특징들(예를 들어 새들을 비교한다면 부리의 유형, 알의 크기, 깃털 색깔, 척추골의 수, 내장의 길이 등)을 그냥 최대한 많이 입력하면, 컴퓨터가 개연성 있는 관계의 패턴을 뽑아내주는 것이다. 이는 두 종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을수록 둘이 가까운 관계일 거라는 생각에 기초한 방법이다. 그러나 컴퓨터는 전혀 말이 안되는 관계를 제안할 때도 많았다. 인간의 직관을 완전히 제거했더니... 혼돈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분기학자들은 어떤 특징들이 다른 특징보다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들이 거쳐 간 시간의 흐름을 가장 신빙성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공통의 진화적 참신함"이라고 부른 특징들, 그러니까 새롭게 추가된 특징들이었다. 이를테면 완전히 새로운 더듬이라든가 반짝이는 노란 지느러미 같은 것들 말이다. 모델에 추가된 참신한 업그레이드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다면, 그 새로운 특징을 따라 생물들이 거쳐 간 다양한 버전을 추적할 수 있고, 시간의 화살이 어느 길을 가리키고 있는지 (좀 더 자신 있게) 추측할 수 있고, 더 큰 확신을 갖고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단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발견은 단순했고, 미묘했고, 특출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아주 놀라운 관계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박쥐는 날개가 달린 설치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낙타와 훨씬 더 가깝고, 고래는 실제로 유제류(발굽이 있는 동물로, 사슴이 속한 과)라는 사실이 그렇다. "어류"라는 범주가 모든 차이를 가리고 있다. 그 범주는 가까운 사촌들을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잘못된 거리 감각을 만들어낸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반세기 동안 분류학자로 일해온 데이브 스미스는 애매하게 얼버무리는 몇 마디를 뱉어내다가 결국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인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의 일, 생명의 진정한 상호 연관을 밝혀내는 일을 정말로 할 마음이 있다면, 그들이 하는 말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류"라는 것은 그것을 제대로 직시한다면 사실 틀린 범주라는 것을 말이다. 명료하지 않고 날림으로 만든 이 범주-분류학자들의 용어로는 측계통군-에는 그 구성원들의 일부가 빠져 있다. 나중에 나는 미국자연사박물관의 어류분과 수석 큐레이터인 멜라니 스티아스니에게 전화해 긍게서도 어류라는 범주가 사라졌는지 물었다. 멜라니는 "어이쿠" 하고 운을 떼더니 "널리 그렇게 받아들여지죠"라고 말했다. 당신도 상상할 수 있듯이 무덤덤하게. "맞아요. 직관에 어긋납니다!" 자칭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인 릭 윈터바텀이 내게 한 말이다. 그는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려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관념이 학계 밖으로는 도저히 퍼져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 그는 자기가 대적하기에 너무 센 적수를 상대하고 있는 것 같다고 걱정스러워했다. 그 센 적수는 바로 직관이다. 그는 사람들이 결코 편안함을 진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우주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서 그가 사랑하는 물고기를 빼앗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낀 약간의 병적인 만족감을 제외하면, 내게 그것이 중요한 일인가? 조금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표본들을 유리단지에 정리하는 것이 직업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범주로서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일일까? 헤더는 코페르니쿠스를 예로 들었다. 그 시대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움직이고 있는 게 별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에 관해 생각하고, 별들이 매일 밤 그들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천구의 천정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서서히 놓아버릴 수 있도록 수고스럽게 복잡한 사고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별들을 포기하면 우주를 얻게 되니까"라고 헤더는 말했다. 물고기를 포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순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물고기의 반대편에 다른 뭔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물고기를 놓아주는 일은 그 결과로 또 다른 어떤 실존적 변화를 불러온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아버지는 "어류"라는 단어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 건 이해하지만 유용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경험하는 제한된 방식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것이 걱정되지 않으냐고 내가 묻자, 아버지는 불만스럽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그게 뭐든, 아직 내가 해방되기에는 너무 늙었어." 큰언니는 물고기를 놓아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전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는 오진을 받고, 급우들과 이웃들, 부모, 나에게서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정말로 이 물음은 모든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나는 시카고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더이상 나의 연옥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내 인생을 계속 살아가야 했고 혼돈 속으로 다시 들어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봐야 했다. '나는 이 사람이 없는 인생은 결코 원하지 않아.' 이건 내가 그려왔던 인생이 아니었다. 체격이 아주 작고, 나보다 일곱 살이 어리며, 자전거 경주에서 나를 이기고, 툭하면 나를 향해 어이없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은. 그러나 이건 내가 원하는 인생이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자연이 프린트된 커튼 뒤를 들춰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를 보았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느낌이었다.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요약 우리가 지어낸 질서를 무너뜨리고 그 짜임을 풀어내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라고 하는데, '진실이 아닌 모든 것을 믿지 않기' 또한 맹목적으로 느껴짐. 유용하다면 취하기 vs 진실이 아닌 모든 것을 믿지 않기.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물고기를 놓아주는 일이 사람에 따라 다 다르듯이 '사실'의 중요도는 내게 엄연히 다르다. 어떤 사실에 대한 태도를 둘 사이의 어느 지점에 할당할지는 나만의 기준으로 정하면 되는 것이다. 출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