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갈등 #
#2026-08-18
#1
순응이 트라우마 경험의 기본값이 되면, 사라지는 것은 우리의 투쟁 대응만이 아니다. 갈등을 알아차리거나 느끼는 능력 자체가 점점 희미해진다. 자신에게 해로운 일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을 우리가 감내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로 바꿔버린다.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놀라운 이야기꾼이 된다. 상대가 실제로는 지니지 않은 재능과 의도를 덧씌우고, 현실과는 다른 결말을 상상하며, 명백히 역기능적인 상황 속에서도 구원의 러브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그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와 인생 자체를 쏟아붓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엄마는 새아빠의 학대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잔인하게 굴고 사람을 함부로 처벌하는 측면은 엄마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는 어떤 일이든 새아빠의 입장을 채택했고, 그로써 모든 불협화음을 없애버렸다. 엄마가 보는 새아빠는 더 똑똑하고, 더 유능하고, 더 준비된 사람이었다. 엄마는 자신을 스스로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그것이 원래 자기 모습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건강한 갈등을 목격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하게도 갈등을 회피하는 성향을 띤다. 건강한 갈등은 서로를 존중하며 각자의 취약함을 나누고, 그 과정을 통해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건강한 체계 안에는 상호성과 존중이 있다.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쌍방이다. 그러나 순응형 사람들의 신경계는 그런 체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갈등을 피하는 것은 친밀함을 피하는 일이다. 순응 반응은 우리가 진짜 안전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건강한 갈등을 감당할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하며, 현실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치유되는 것을 방해한다.
이는 갈등 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덮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처리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가려두고, 이미 초연해졌다고 스스로를 속인 채 살아간다.
#2
우리가 갈등을 피한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화났다고 말하지 못할 뿐이다. 때로는 스스로 분노를 느낄 자격이 없다고 여기거나, 아예 내면에 분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분노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기도 한다. 내면은 혼란스럽지만, 애착 욕구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견디려 한다. 그 결과 음주나 약물, 이상 섭식, 자해 같은 방식에 의존하게 되기도 한다. 상대에게 직접 행동할 수 없기에 우리의 행동은 겉돌거나 안으로 향한다.
세이디는 거식과 폭식, 구토를 반복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몸 안에서 치솟는 것을 느꼈다. 폭식은 그 소란을 잠재우는 방법이었고, 구토는 모든 것을 밖으로 내던지는 방식이었다. 세이디는 이렇게 말했다.
“내 섭식장애나 중독은 꼭 문제 있는 부모 같았어요. 이렇게 말하는 거죠. ‘넌 그런 감정 느끼면 안돼! 우리가 다 가져갈게.”
오랫동안 세이디로서는 자신을 지킬 방법은 오로지 그런 행동들뿐이었다. 만성적인 순응 반응과 마찬가지로 중독 역시 트라우마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흔하다. 위안을 얻기 위해 몸이 찾아낸 방편이며, 한 번 효과를 본 방식은 쉽게 굳어진다.
우리에게는 타인의 보호에서 오는 안전감이 필요하고 관계, 팀, 직무에서 선택받을 때의 안도감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가 과도하게 봉사하고 완벽주의에 갇히는 이유다. 우리는 선택받고 싶다.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나와 결혼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궁극적인 선택을 받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을 뜻했다.
우리는 새로운 관계에서 얻는 안전감이 과거의 결핍을 메워 줄거라고 기대한다. 그것은 결혼일 수도 있고, 소속감일 수도 있으며, 일자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더이상 내 가치를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진짜’ 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를 버리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대신해 줄 사람은 없다. 이것은 비단 하나의 관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나로 존재하지 못하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 ‘나’로 향하는 문을 여는 일이기도 하다.
#
#출처
책 포닝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