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더이상 드러낼 수 없는 상태 #
#2026-08-17
#1
해로운 여건에 대응하며 우리는 순응 반응을 형성한다. 순응 반응에는 흔히 숨기기, 상황에 맞춰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기, 거짓말이 뒤따른다. 이 행동들은 마치 ‘내가 결함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증명하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생겨난 반응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며 ‘나는 엉망이야’라고 결론 내린다. 그렇게 우리는 수치심과 축소된 자아감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공간이다. 삶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치유를 위해 우리는 호기심과 연민, 취약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수치심 위에서는 자라지 못한다. 우리 신경계가 마치 납치당한 것처럼 반응하게 된 것에 대해 비난하는 일은 잔인할 뿐 아니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치심은 순응 반응이 계속 유지되도록 단단히 붙잡아두는 역할을 할 뿐이다. 수치심을 덜어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만성적인 순응 반응과 그로 인해 치른 대가를 하나씩 내려놓을 수 있다.
#2
그레이스는 제약 속에서 위안을 느꼈다. 누군가가
그녀가 수많은 가면 때문에 치른 대가를 자각하기까지는 몇 달이 더 필요했다. 그 대가는 바로 진정한 자아와의 연결을 잃는 것이었다.
자신을 뒤틀어서라도 상황을 진정시키는 법을 익히게 되면 순응 반응에서 벗어나는 일은 매우 어려워진다. 건강한 갈등은 일정 수준의 불편을 감내하는 것을 포함하지만, 순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건강한 갈등이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한다. 지금의 관계가 그런 갈등을 감당할 수 있는 관계인지 알 수 없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다.
몸은 늘 위협의 기미를 감지하려 긴장한 채 주변을 살피기 때문에 잠재적인 불편조차 버겁기만 하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실망한 기색을 보이면, 그것은 곧 ’다시 그 일이 벌어질 신호‘로 해석된다. 그래서 우리는 반사적으로 양파를 좋아한다고 답하고 만다. 다시는 거칠게 발에 차여 집 밖으로 내쳐지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힘을 기른다는 것은, 우리가
#3
그레이스는 외줄타기가 주는 안전감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상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타인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삶을 원하지 않았다. 상황마다 다른 모자를 쓰는 방식에 지쳤고, 피할 수 없는 내적 갈등은 깊은 우울감으로 이어졌다.
’너 자신이 되어라‘는 조언은, 순응이 왜 필요했는가 하는 맥락을 쉽게 지워버린다. 우리가 다른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다른 의견에 동화했던 것은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순응 반응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 내면의 본질적인 부분을 되찾고, 앞으로는 그것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러나 그 길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필요한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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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 포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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