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더이상 드러낼 수 없는 상태

나를 더이상 드러낼 수 없는 상태 #

#2026-08-17


#1

해로운 여건에 대응하며 우리는 순응 반응을 형성한다. 순응 반응에는 흔히 숨기기, 상황에 맞춰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기, 거짓말이 뒤따른다. 이 행동들은 마치 ‘내가 결함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증명하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생겨난 반응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며 ‘나는 엉망이야’라고 결론 내린다. 그렇게 우리는 수치심과 축소된 자아감을 안고 살아간다.

수치심의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좋은 부분들과의 연결을 잃는다. 단지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남았을 뿐인데, 결함 있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네가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멈춰 서서 진위를 따지기보다 수치심을 안겨준 그 사람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내가 숨기는 건 저사람이 나를 싫어해서. 근데 숨길때 저사람에 맞추면, 사람들은 자기랑 다른 사람들을 불편해하고 꺼려하니까 그게 불편해서지, 숨겨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숨길 필요가 없는 면이다. 오히려 나의 소중하고 특별한 특성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 이유로 나를 사랑할 것이다)(즉 누군가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불편할 것인데 이대로 가겠느냐 아니냐?를 선택하라는 신호로 여기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공간이다. 삶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탐색할 수 있는 공간.

(나는 왜 그런 모습을 가졌을까? 그 모습은 어떤 사람들이 싫어하고 어떤 사람들이 좋아할까? 그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성을 가졌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성을 가졌을까? 이런 모습을 가진 나는 어떻게 살고싶은가?)(이런 생각들을 하기 위해서 나는 점심시간의 자유를 나에게 주었다)

치유를 위해 우리는 호기심과 연민, 취약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수치심 위에서는 자라지 못한다. 우리 신경계가 마치 납치당한 것처럼 반응하게 된 것에 대해 비난하는 일은 잔인할 뿐 아니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치심은 순응 반응이 계속 유지되도록 단단히 붙잡아두는 역할을 할 뿐이다. 수치심을 덜어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만성적인 순응 반응과 그로 인해 치른 대가를 하나씩 내려놓을 수 있다.

#2

그레이스는 제약 속에서 위안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정해주는 것이 편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 주변에는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나도 뭔가 멋져보이는 선택을 하는 누군가를 항상 따라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은것같다. 혼란이 오면 물어보고 그들이 어떻다고 말하면 정말 그런것같다라고 생각이 드는 사람들을 따라하면서 안전하다고 생각했던것같다)(엄마한테 그렇게나 큰 배신감을 느낀것도 그거였겠지? 시키는대로 하면 다 이상해 나한테 이상한 옷만 사줘 이상한 요구를 해 말하는대로 절대 하면 안돼 이런 생각들이… 그것도 다 연결되어 있는것같아)

그녀가 수많은 가면 때문에 치른 대가를 자각하기까지는 몇 달이 더 필요했다. 그 대가는 바로 진정한 자아와의 연결을 잃는 것이었다.

자신을 뒤틀어서라도 상황을 진정시키는 법을 익히게 되면 순응 반응에서 벗어나는 일은 매우 어려워진다. 건강한 갈등은 일정 수준의 불편을 감내하는 것을 포함하지만, 순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건강한 갈등이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한다. 지금의 관계가 그런 갈등을 감당할 수 있는 관계인지 알 수 없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다.

몸은 늘 위협의 기미를 감지하려 긴장한 채 주변을 살피기 때문에 잠재적인 불편조차 버겁기만 하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실망한 기색을 보이면, 그것은 곧 ’다시 그 일이 벌어질 신호‘로 해석된다. 그래서 우리는 반사적으로 양파를 좋아한다고 답하고 만다. 다시는 거칠게 발에 차여 집 밖으로 내쳐지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힘을 기른다는 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피해왔던 두려움과 압도감에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서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

(재수도 내가 선택했을때 망가질까봐 두려운 마음에 강박적으로 앉아있었다. 이것도 순응 반응의 일부일까..!)

#3

그레이스는 외줄타기가 주는 안전감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상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타인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삶을 원하지 않았다. 상황마다 다른 모자를 쓰는 방식에 지쳤고, 피할 수 없는 내적 갈등은 깊은 우울감으로 이어졌다.

’너 자신이 되어라‘는 조언은, 순응이 왜 필요했는가 하는 맥락을 쉽게 지워버린다. 우리가 다른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다른 의견에 동화했던 것은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순응 반응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 내면의 본질적인 부분을 되찾고, 앞으로는 그것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러나 그 길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필요한 일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잃을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 연민을 갖는 것이다.

(나는 내 의지대로 선택할때보다 즉 내눈에는 전혀 아니더라도 그걸 했을때 긍정적 피드백이 온다는게 어렸을때 학습이 되었던것같다. 내눈에는 안예뻐보여도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것과 세상이 예쁘다고 생각하는것은 별개라고 (솔직히 지금까지도) 당연하다는듯 생각하고 있는것 같다.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한것이 맞는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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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 포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