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함을 마주하는법 #
#2026-07-29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불편한 느낌들을 회피하거나, 통제하거나, 벗어나려는 인간의 본능은 당연한 것이다. 물리적 위험을 피하려는 본능은 오랜 세월 인류를 안전하게 지켜왔고,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머릿속의 불안과 걱정 같은 위협에도 똑같이 대응하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당신은 이성의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 걸 안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그 반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경험은 말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느낌을 물리칠 수가 없다고.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잠시 잊을 수는 있겠지만 프로그램이 끝나는 순간 곧바로 스트레스가 밀려든다. 심지어 더 강력해진 상태로.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 온갖 이유들을 열거하며 걱정을 누그러뜨릴수는 있겠지만 그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는가? 모양만 다를 뿐 똑같은 걱정이, 혹은 전혀 다른 걱정이 밀려든다.
더구나 감정의 회피는 삶의 공간을 ‘축소’한다. 모든 것이 위험하다면 안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어떤 위협도 미치지 못하는 구석에 숨어 있으면서 무서운 무언가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지 않기만을 바란다. 평가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친밀감에 대한 부담감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을 밀어내며,
어쩌면 당신은 모든 느낌들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단지 나쁜 느낌만을 피하려 애쓰는 것뿐이라고. 그러나 모든 파도를 피하지 않고 나쁜 파도만 피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어떤 파도가 당신을 덮칠지는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헤엄친다는 것은 모든 파도에 나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더 마음에 드는 파도가 있을 것이고, 더 기꺼이 젖고 싶은 파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취향은 실제로 밀려드는 파도와 아무 상관이 없고 그 파도에 대한 당신의 통제력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모든 파도를 평가해서 오직 좋은 파도만이 밀려들기를 바란다면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이 여전히 재미있을까?
“불편함에 마음을 열어라”, “스트레스와 더불어 살아라”, “불안한 느낌을 받아들여라” 같은 말들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느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느낌을 떨쳐버리려 애쓰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개념이다. 사실 이런 말들은 위험 신호에 반응하려는 생물학적 본능을 거스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마음을 여는 연습을 하기에 앞서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달갑지 않은 느낌을 위해서 공간을 만드는 시도는 고통을 느끼는 작업에 능숙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당신은 느낌을 지니고 있는 것에 서툴 수도 있다. 늘 어떤 감정들로부터 도망치려 했다면 회피하는 연습은 부단히 해온 반면, 느낌을 지니고 있는 연습은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것에 노련해진 스스로를 상상해 보라. 그것은 고통이 삶에 파고들 때 그것을 느끼되 휘둘리지 않고 있던 자리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수용’이다. 수용을 연습하려면 먼저 받아들이는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한다. 무엇을 받아들일지 명확히 해라. 실패를, 혹은 비참한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들과는 달리 당신은 결과에 대한 통제권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스티븐 헤이즈 박사는 그 점을 멋지게 표현했다.
비록 사소한 차이일지라도 당신이 쓸쓸한 기분과 비참한 기분을 구분할 줄 알고, 짜증 나는 것과 화가 나는 것을 구분할 줄 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당신에겐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고 다른 행동을 선택할 힘이 있다. 그러나 당신의 과거와 느낌들은 그저 그 자체로만 존재할 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글이랑 이 글이 나에게 엄청 필요한글같아서인지 여러번 곱씹으면서 읽었다.
세상과 나를 잘 이해하고싶다 그로써 마음속 혼란을 줄이고 싶다. 명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명확하지 않음을 이해하고 불명확함을 잘 인지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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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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