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지 않아도 괜찮은가

같지 않아도 괜찮은가 #

#2026-07-20


내가 지금까지 접한 ‘정상’의 정의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예측 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회적 계약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모든 구성원이 서로 간에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신뢰를 예측 가능성의 정도로 판단한다.

예측 가능성은 사회적 통합을 돕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긴장을 완화시키는 장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익하며 대체로 긍적적 효과를 낸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생각을 읽거나 속마음을 미리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우리의 좋은 의도를 보여주려 노력한다.

이는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일정하게 예측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우리는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 목숨을 내맡기기도 한다. 비행기 조종사, 건설 기술자, 의사, 횡단보도 앞에서 마주치는 운전자 등이 그 예다.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거나 음료를 마실 때마다 사실상 우리는 ‘극도의 신뢰 행위’를 수행하는 셈이다. 뒷받침할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 안에 독이 들어 있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니 말이다(실제로 이런 신뢰는 대부분 타당하다. 이런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피해망상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집단에 소속되려면 이처럼 사회가 승인한 행동 양식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공동체 지향인들은 예측 가능하고 신뢰할 만한 존재로 여겨지지만 이향인은 의심이나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비소속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불편해한다(물론 타인의 생각이나 다음 행동을 아는 것이 일반적으로 가능하진 않지만 말이다). 다수가 정한 사회적 대본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이향인들이 겪는 고충이다. 그들은 공동체의 목적을 위해 가장 내밀한 자기 정체성을 버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다. 집단의 생각이 힘을 가지려면 그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그 생각을 따르고 거기에 동의해야 한다. 이를 뒤집어 이야기하면, 현실을 개별적 경험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그 집단이 공유하는 인식을 방해할 수 있고, 그것이 공동체 질서에 위협이 된다는 뜻이다. 이향인은 사교보다 고독을 선호한다는 이유로 이상하고 잘못된 존재 취급을 받는다. 자신이 항상 오해받고 심지어 불신의 대상임을 잘 아는 이향인들은 그래서 집단의 예절을 따르며 소속된 듯 보이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대본을 따르다 보면 주변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만남조차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롭고 지치는 일이 되어버린다.

‘정상적’이고 위협적이지 않아 보여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쌓이면 이향인들은 자신의 본래 성향을 끊임없이 숨겨야 한다는 점에서 깊은 좌절감을 느낀다. 규칙을 따르고 예측 가능해 보이려고 애쓰지만 이런 가식을 오래 유지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공동체적 행사에 대한 반감을 감추는 데 매우 능숙해서 그들과 진심으로 함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선의의 권유를 받는다. 하지만 가끔 이런 권유가 겉으로는 그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거나 소외되지 않게 하려는 배려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집단의 정당성을 무의식적으로 확인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 이향인은 대체로 대립을 피하고 갈등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런 권유에 상당히 쉽게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본능에 반하는 행동은 십중팔구 부작용을 낳는다. 권유들은 꼭 참여해야 하는 의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의무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필요한 의무와 불필요한 의무. 필요한 의무란 내키지 않지만 직업적으로나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다. 이를테면, 직장에서 지루하고 의미 없는 업무들 처리하기, 혹은 아이의 발표회에 참석하기 등이 있다. 반면 불필요한 의무란 하고 싶지도 않고 해야 할 필요도 없지만 사회적 압력을 느껴 억지로 하게 되는 일들이다. 주말을 끼고 며칠씩 이어지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혹은 직장 동료들과 퇴근 후 사교 모임 갖기 등이 그 예다. 이향인을 지치게 하는 의무 중 대다수가 먼 친척의 결혼식처럼 사실은 불필요한 것들일 가능성이 노파. 그들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이고, 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좋지 않게 볼 거라 여기며 마지못해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다.

이향인들은 여가와 관련된 약속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 물론 어떤 이유로든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초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참여해야 하는 건 아니다. 참석한다고 해서 특별히 인정을 받지도 않는다. 그리고 참석하지 않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 해봤자 몇몇 사람들이 당신의 ‘비사교성’에 대해 수군거리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렇게 수군거리는 사람들이야말로 애초에 당신이 피하고 싶었던 사람들이니 말이다.

집단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선의의 거짓말을 보태서라도 정중하게 자리를 피해야 한다. J는 자신의 진짜 마음에 따라 살기로 했고, 그 즉시 그의 삶은 훨씬 나아졌다. 놀라웠던 점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좋아했고,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은 계속 좋아하지 않았다. 나머지, 즉 애초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은 그대로 무관심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예 눈치채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향인은 타인의 존재에 매우 민감하기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남을 의식한다고 착각하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공동체 지향인들은 개별 구성원의 존재나 부재보다 집단 전체에 훨씬 주의를 기울인다. 불필요한 사회적 모임에서 벗어나면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 대부분 그저 우리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J 외에도 많은 환자들이 같은 방법을 시도했다. 그리고 아무도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굳이 가고 싶지 않았던 자리에 더이상 초대받지 않게 된 것 외에는 말이다. 이향인에게는 오히려 이상적인 결과인 셈이다.

그저 가지 않을 권리를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향인들이 억지로 맞추려는 스트레스를 줄이면서도 자신의 본모습을 존중하고 소중한 시간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인간의 본성을 위협하는 것은 지나친 개인적 충동과 선호가 아니라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

#생각

처음에는 ‘겉도는 것에 대한 걱정’이 없다기에 나는 이향인이고 싶은 내향인인가?하고 거리를 조금 두면서 읽었는데, 이 부분에서 나는 확실한 이향인임을 깨달아서 이미 내가 지키고 있던 것에는 많은 지지를, 내가 생각하지 못했거나 긴가민가했던 부분에서는 행동 강령을, 감정적으로 흔들렸던 예전 기억에 대해서는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다.

#

#출처

책 이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