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평화 #
#2026-07-19
#1
스물네 살이 된 그는 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고, 최근에는 대학 시절 연인과 약혼했으며, 어린 시절의 절친들과도 여전히 가깝게 지낸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는 앞으로도 집단의 관찰자로 남을 것이고 진정한 참여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 삶에서 그는 분명 완전한 참여자다. 스스로 선택한 일과 함께하기로 한 사람들 사이에서 온전히 만족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향인이 가야 할 이상적인 길이다.
#2
불편해지는 순간들, 이를테면 마트에서 대여섯 명이 뒤에 줄을 서 있을 때 그녀는 무리에 ‘참여’하도록 강요받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상황들, 이를테면 차 안이나 야외 카페에 혼자 앉아 있을 때는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그저 바깥에서 지켜보는 관찰자였다. 극장이나 붐비는 버스에서도 맨 뒤에 앉으면 관찰자의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공간의 분위기를 읽어 그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야 편안해졌다.
#3
온순한 저항가들은 천성적으로 무척 예의 바르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는 성향이 있다. 대립을 꺼리고 종종 지나칠 정도로 배려심이 깊다. 그들의 독특하거나 일반 상식에 어긋난 생각이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을 굳이 표현하지 않으려는 태도 덕분에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상대방에 맞춰주려 애쓰고 방해가 되지 않으려 조심하며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을 극도로 불편해하는 그들은 때론 나약하거나 자신을 과도하게 낮추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이향인은 다수의 합의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때조자 신중히 행동한다. 의문 제기나 반대가 사회적 조화를 깨뜨릴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4
집단의 공통분모에 맞춰 행동하려는 본능이 없는 이향인은, 암묵적인 상호작용의 규칙을 세심히 관찰하고 익혀서 따라 하는 연습을 해야한다. 온순한 저항가는 차례를 지키고 파란불을 기다리며 상황에 맞는 말을 한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세심히 관찰하며 하나하나 배워서 그렇게 행동한다. 다시 말해 겉으로는 규칙들을 철저히 지키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5
자신의 가짜 외향인 시절을 돌아볼 때, 성인이 된 이향인들은 종종 과거에 보였던 활발한 모습과 지금의 과묵한 성향 사이의 차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이는 성장 과정에 따른 변화로,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연기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향인의 진짜 자아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공간이 생기고 그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이는 환자 A의 사례와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20대에 접어들면서 이향인들이 집단에 참여하지 않아도 눈에 덜 띄는 시점이 찾아오자 그는 비로소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선택한 일과 인간관계로 가득한 삶을 꾸려갈 수 있었다. 진정한 연결감과 기쁨을 안겨주는 매우 행복한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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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 이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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