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

진짜 나 #

#2026-06-30


#1

“나는 이른바 명문 대학을 나왔습니다. 지금 직장이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동기들은 대기업에 다닙니다. 내가 하는 일은 정말 시시합니다. 내가 보는 나와 그들이 보는 내가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요? 직장 상사들도 너무 ‘내 수준’에 맞지 않습니다. 저런 사람들과 내 인생을 오래 같이 할 생각을 하니 속이 상합니다. 그래도 지금의 일을 나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마치 이 직장이 최선의 선택인 것처럼 짐짓 생각하며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지 내가 ‘나’ 같지가 않습니다. 뭔지 빈 것 같은 공허감이 내 속에서 나가지 않고 나를 괴롭힙니다. 이렇게 사는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인정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멩게 표현하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가끔 화도 낼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내 감정을 드러낸다고 해서 어른인 나를 누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잘 안됩니다.

좋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상당한 대가를 치르는 일이라는 것을 세월이 적지 않게 지난 이제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합니다. 내가 달라지니까 남들도 나를 존중해줍니다. 좀 더 일찍 이럴 걸 그랬습니다. 그런데두렵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막 행동해도 되는지요? 그러다가 남들이 나를 싫어하고 내 인생에 문제가 더 생기면 어떻게 하나요? 하지만 나는 내 목소리를 되찾은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이기적으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남들이 원하는 나’를 ‘내가 원하는 나’로 착각하며 살면서 스스로르 속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출근한다. 상사의 눈치를 본다. 커피 한 잔 타드릴까요? 하고 물어봐도 대답이 시원찮다. 오늘은 웃지 말고 표정 관리를 해야할 것 같다.”

많은 직장인들이 이런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런 나의 하루는 ‘진짜 나’와 ‘가짜 나’의 싸움입니다. 물론 ‘진짜 나’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 생겼고 어떤 식으로 엄마의 자궁 속에 존재하였으며 어떻게 태어났을까요?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자궁 속에서의 경험을 기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에 대한 경험은 태어난 후 18개월에서 24개월 사이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내 생각과 느낌이 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나’를 의식하며 살게 됩니다. ‘진짜 나’를 찾고 지키려고 애쓰며 살게 됩니다.

사는 내내 ‘진짜 나’는 ‘가짜 나’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가짜 나’는 ‘진짜 나’에게 대답합니다. “세상에 너를 다 드러내는 것은 위험해. 약간의 위장술은 필요하잖아.” 이렇게 ‘진짜 나’와 ‘가짜 나’는 충돌합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어쩔 줄을 모릅니다.

#2

평소 ‘진짜 나’를 잘 지키고 있는 사람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남이 나를 우습게 보더라도 묵묵히 내가 가진 장점을 활용하면서 내가 갈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갑니다. 속이 상하더라도 나를 내가 파괴하는 어리석은 행동에 빠지지 않고 나를 잘 지켜내고 위기를 극복합니다. 쓸데없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목적 있는 삶을 거침없이 물 흐르듯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짜 나’를 지키는 나는 환상 속에 살지 않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내 능력이 무엇이고 내가 무엇으로 움직이며 내가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는지를 잘 압니다. 나의 약점을 부정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약점마저도 보듬어 안고 갑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나의 가치관과 소망하는 바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 반면에 ‘가짜 나’는 ‘만들어진 나’입니다. ‘진짜 나’를 덮고 있는 껍질입니다. ‘가짜 나’를 벗기고 ‘진짜 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짜 나’에 익숙해져 있을수록 ‘진짜 나’를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진짜 나’인지 ‘가짜 나’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내 성격이 내성적인가, 외향적인가를 생각해보세요. 한쪽으로만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흔히 섞여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내성적으로 또는 외향적으로 행동합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내가 나인지,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쉽게 알기 힘듭니다. 남이 보는 나, 가까운 사람들이 아는 나, 나 자신만이 아는 나 외에 나도 모르는 내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내가 있는 것은 내가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소망, 욕구, 환상, 시기, 질투, 원망을 남들이 알면 거북합니다. ‘진짜 나’ 중 일부는 무의식에서 잠복 활동 중입니다.

지금의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막연히 ‘이건 내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그것입니다. 애매하게 느껴지는 불편이나 공허가 ‘진짜 나’로 나를 이끄는 단서입니다. ‘진짜 나’와 ‘가짜 나’ 사이의 간격이 너무 심하면 내 인생의 톱니바퀴가 헛도는 느낌이 듭니다. 뭔가 연결이 끊어진 것 같이 느껴집니다.

‘가짜 나’로 그냥 살다가 막상 ‘진짜 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동안 고통을 피하기 위해 ‘가짜 나’를 전면에 내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나를 찾은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백배 좋습니다.

‘진짜 나’는 파묻혀 있더라도 결국 큰 목소리를 냅니다. ‘진짜 나’를 찾기 위해 우리는 감히 힘든 일도 합니다. 마음의 상처를 먹는 것으로 달래다가 엄청나게 뚱뚱해진 그녀는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로 위를 잘라냅니다. 어떤 이는 눈총을 받더라도 성정체성을 밝히고 커밍아웃을 합니다. 또 다른 이는 가족 전체의 비난을 무릅쓰고 자신이 믿고 싶은 종교로 개종합니다.

#3

‘진짜 나’를 찾더라도 그것을 잘 지키고 살려면 솔직해야 합니다. 솔직하면 가끔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솔직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나를 드러내면 남들이 나를 싫어하거나 심지어 배신합니다. 그래도 솔직함이 ‘진짜 나’의 에너지원입니다. ‘진짜 나’를 지키려면 늘 세심하고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다가 가고 싶지 않은 곳에 엉뚱하게 가는 일을 피하려면 애를 써야 합니다. 대충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힘이 듭니다. ‘진짜 나’를 지키려면 일상의 자잘한 즐거움을 포기해야 합니다. 여럿이 모여 웃고 떠들지만 끝나고 나면 허탈한 모임을 줄여야 합니다. 그런 자리의 단골 메뉴인 남의 뒷이야기, 남이 어려움에 빠진 이야기는 늘 자기애적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지만 껌과 같이 곧 단물은 빠지고 턱관절만 아픕니다. 남을 너무 씹으면 내 마음의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치아’가 닳아버립니다. 남이 원하는 것을 너무 의식하고 그것에 맞추려고 하면 ‘진짜 나’를 지킬 수 없습니다. 잘못하면 자아의 모습이 변해버립니다. 남이 나를 싫어하거나 떠날지라도 나를 지키기 위해 내 깊은 마음에서 울려 퍼지는 ‘진짜 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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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짜 나’가 가끔은 마술 망토의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직 취약한 ‘진짜 나’를 남이 볼 수 없도록 가려서 보호합니다. 보호받는 동안 ‘진짜 나’는 세상의 파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기릅니다. 하지만 계속 ‘가짜 나’의 보호를 받으며 산다면, 숨 쉬며 살고는 있지만 진정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짜 나’의 삶을 사는 것은 역할을 통해 사회나 조직에 적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기 위해 일시적인 역할을 하는 것과 나 전체가 통째로 ‘다른 나’로 바뀌어 사는 것은 사과와 고구마처럼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둘 다 밥상에 올라오지만 사과는 과일이고 고구마는 채소입니다. ‘가짜 나’의 힘이 너무 세지면 ‘진짜 나’를 압도하고 내 주인 노릇을 합니다. 내가 흔들립니다. ‘가짜 나’가 적응과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진짜 나’는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가짜 나’와 ‘진짜 나’의 경쟁이 시작되면 ‘가짜 나’는 ‘진짜 나’의 영양분을 빼앗고 성장을 방해합니다. 나를 마비시키고 질식시킵니다.

내가 ‘가짜 나’의 노예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증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집중을 못 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창피해합니다. 걱정이 많고 비관적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고집을 부립니다. 공허하게 느끼고 혼자 지내려 합니다. 참지 못하고 비판하고 걸핏하면 화를 냅니다. 이기적이고 거만하며 시기하고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혼자 지내거나 아니면 친구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좋은 친구는 없습니다. 일, 놀이, 휴식의 균형을 못 잡습니다. 인생을 길게 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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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짜 나’는 쉽습니다. ‘진짜 나’를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쉬운 편안함을 포기하고 ‘진짜 나’를 찾아 떠나는 것은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가짜 나’인 내가 이미 다른 사람들과 맺은 허망한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고통스럽습니다. ‘진짜 나’를 찾는 길의 입구는 혼돈의 바다를 건너서 한참을 가야 희미하게 보입니다. 힘들더라도 ‘진짜 나’에 가까이 가면 모든 것이 다시 정리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남이 아니고 내가 됩니다. ‘진짜 나’는 에너지 효율이 높습니다. 나를 남으로부터 방어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짜 나’의 방어선을 계속 지키는 데는 엄청난 힘이 듭니다. 마음의 빈 구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지켜내야 합니다. 항상 공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전쟁입니다. ‘진짜 나’는 혼자서도 잘 지냅니다. ‘진짜 나’는 주변이 달라진다 해도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가짜 나’는 의존하던 사람이 떠나면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진짜 나’가 없으면 남의 노예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가짜 나’는 사람을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 여깁니다.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도구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니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나가지 못합니다. 그가 맺는 관계에서 남는 것은 씁쓸함, 불행, 탈진뿐입니다.

#6

‘진짜 나’와 ‘가짜 나’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애착입니다. 애착 관계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면 아이는 편안하게 크지 못합니다. 아이는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진짜 나’를 지키지 못하고 포기합니다. 나를 지키면서도 남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자아’라는 사과에 벌레가 먹는 것과 같습니다.

#7

‘나’는 내 약한 자아를 이런저런 방어기제로 둘러쌉니다. 그런 상태를 오래된 정신분석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성격 갑옷character armor’을 입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 갑옷에 부딪친 적이 있는 사람들은 내 성격이 까칠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갑옷은 천근같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누군가 다정하게 내 약한 자아를 감싸주면서 성장하도록 도와주었으면 하고 소망합니다. 그러면 갑옷을 벗을 수 있지만 그런 좋은 사람을 찾기는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세상에는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들이 계곡의 돌처럼 깔렸습니다. 갑옷 없이는 돌 맞고 피 흘리기 십상입니다. 오늘도 나는 갑옷 속에, ‘가짜 나’ 속에 꼭꼭 나를 숨깁니다.

#8

정신분석가는 이런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할까요? 정신분석가는 분석 받는 사람의 약한 자아가 상처받지 않고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돕습니다. 분석 시간에 ‘포용적 환경holding environment’을 제공하려고 애씁니다. 비판하지 않고 편들지도 않으면서 그가 하는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주려 합니다. 그 이야기의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그 사람의 자아가 안과 밖을 보는 시각을 서서히 넓혀주려고 합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문제의 뿌리를 그와 분석가의 관계를 거울 삼은 전이 분석으로 정리하고 해소시키려 합니다. 그러면 그는 옛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관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대할 때, 상대방을 대할 때 ‘포용적 환경’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무의식은 그런 환경에서만 우리에게 얼굴을 보여줍니다. ‘포용적 환경’이 ‘성격 갑옷’을 벗기고 ‘진짜 나’의 자유를 다시 찾도록 도와주는 첫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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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 프로이트의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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