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 #
#2026-10-21
이별의 슬픔은 끔찍한 순간과 함께 시작된다.
이 순간의 온전한 의미는 참으로 가슴 아프고 남과 나눌 수 없을 만큼 깊고 고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순간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늘 가벼운 패닉 상태를 느낄 것이다.
패닉은 악몽과 같아서 패닉에 빠지면 우리는 전에 없이 소리를 지르고 얼굴과 몸을 뒤튼다. 또 이성을 잃고 평소와 다른 사람이 된다. 이 모든 것을 겪거나 목격하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슬픔은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고 했는데, 패닉은 어떤 면에서는 부정직한 감정이다. 패닉은 거짓말이다.
패닉이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양신 판Pan에서 비롯되었다. 패닉이라는 감정이 판의 이름에서 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틀림없이 판이 신경질적으로 팔짝팔짝 뛰어다녔으리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판은 나그네가 혼자서 숲을 지날 때 섬뜩한 소리를 내는 숲의 신이었다. 사람들은 외진 곳에서 느끼는 갑작스러운 두려움을 파니콘 데이마, 즉 ‘판이 일으키는 공포’라고 여겼다.
패닉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외로움이며, 낯선 광경과 소리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다면 다소 광적인 자극을 접하더라도 패닉은 줄어들것이다.
직관적으로든 이해를 해서든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패닉은 누그러진다.
위기의 순간에는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 떠난 누군가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는 없다. 떠난 이가 없는 삶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아무 도움도 안되는 패닉이라는 무질서한 에너지에 휘둘려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끔찍한 순간에는 정직해지기가 어렵다. 정직해진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슬픔과 비극이 완화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 패닉은 줄여준다.
순간의 무섭고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용기를 “강요된 품위"라고 정의한 것은 유명하다.
그러나 슬픔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시인 필립 라킨의 정의가 더 적절할 듯하다. 그에게 용기의 의미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지 않는 것이다.
#
#출처
책 슬픔의 위안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