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성, 궤도의 이탈과 행복 #
#2025-07-03
#1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보면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너무 닳고 닳은 질문이면서 질문 자체가 명확할 수 없는 난제다. 사실 행복한 순간에는 이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불만 없고 행복한데 저런 쓰잘머리 없는 질문이 떠오를 이유가 없다. 저 질문이 떠올랐다는 건 애초에 지금 행복하지 않고 불만이 많은 것이다.
사실 이 답도 없는 질문은 평생 죽을 때까지 내 곁에 있을 것 같다. 답을 쉽게 내릴 수도 답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질문이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행복은 사랑인가, 만족인가, 감사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건가, 불편함이 없는 상태인가, 건강인가, 인정받음인가. 수많은 답과 의견들이 있지만 무엇 하나 맞는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틀렸다고도 느껴지지 않는다. 맞지만 맞지 않는 그 찝찝함도 사실 이 질문을 다루기 싫은 이유 중에 하나다. 모두가 의견이 다르니까 엄청난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기 딱 좋은 질문이다.
#2
나는 행복을 ‘삶의 자각’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하다’라는 말은 ‘삶을 자각하고 있다’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불행하다’라는 말은 ‘삶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삶이지만 우리는 가끔 어느 순간에 삶을 살고 있다고 자각하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양감과 흥분에 휩싸인다. 나는 이것을 행복이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할 때,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할 때, 시험에서 붙었을 때, 고민하던 문제가 풀렸을 때, 운동이 잘되었을 때 등 삶의 다양한 순간에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한다. ‘아, 이게 사는 거지’, ‘크, 살맛 난다’와 같은 순간이 이런 순간 중 하나다. 이렇게 스스로 무의미한 삶 속에서 삶을 살고 있다고 자각할 때 느끼는 감정을 우리는 행복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쁘진않은데 납득안되는 부분도 있다. 일단 ‘삶을 자각한다’라는건 삶을 계속 살고싶다 혹은 삶을 이제 그만 살고싶다 같이 삶의 존재여부를 신경쓰게되면서 존폐여부를 생각하게되는게 ‘삶을 자각’하는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측면에서 보면 ‘행복’과 ‘불행’이 존재하는 차원 자체가 갖는 특성이 ‘삶에 대한 자각’이 아닐까 싶음. 난 오히려 ‘너무 행복해서 평생 이렇게 살고싶다’라는 기분보다는 ‘너무 불행해서 삶이 무겁고 귀찮아 그만살고샆다’가, 동일선상에서 부호만 반대라고 치면 절댓값은 오히려 후자쪽이 더 컸어서…
정리하자면 삶을 자각하는게 행복이라고 했는데 난 오히려 삶을 자각, 즉 생각없이살다가 삶을 유지하고싶은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드는 시점은 행복할때보다 불행할때가 더 잦고 그 강도도 셌어서 그게 행복의 정의는 못될거같음. 그렇지만 삶을 자각한다는게 행복과 불행이 존재하는 차원이 갖는 특성은 맞는거같다! 평소엔 삶을 유지하고싶다 아니다 이런생각을 안하는데 행복할때랑 불행할때만 드는건 맞으니깐.
#3
합격 후 모든 것이 새로워지면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 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의 본질은 여전히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는 내향적 성격이지만, 이 기간 동안만큼은 외향적인 사람처럼 행동해 보고자 했다. 나는 마치 사회적 실험을 하는 사람처럼,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먼저 다가가 인사도 하고, 작은 농담도 던지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 결과로 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언제나 조용하고 분석적인 사람으로만 보았던 사람들이 나를 에너제틱하고 밝은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MBTI로 설명하자면 INTJ인 내가 ENFJ라는 말을 듣기까지 했다. 이때 나는 모종의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사람들에게 이런 이미지로 다가갈 수도 있구나 하는 점에서였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느낀 것은, 내 외형이 바뀐다고 해서 내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겉모습만 바꾸는 것이 이렇게 큰 스트레스를 유발할 줄은 몰랐다. 하루 종일 사람들과 어울리며 웃고 떠드는 것 자체가 내게는 고역이었다. 나는 사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시간을 보내며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나와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 자체가 큰 에너지 소모를 불러일으켰다.
#4
내 안에서 쌓여 가는 피로는 매일매일 조금씩 더 커졌다. 처음에는 내가 잘해 낼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나도 남들처럼 어울릴 수 있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분위기를 맞추고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제로 능력은 가득했으나 내가 그 행동을 하는 것이 힘들고 싫은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런 모순된 내 모습을 느낄 때면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왜 나는 이토록 나 자신을 바꾸고 싶은 걸까?” 사실 나는 내가 내향적이라고 자각했지만 앞으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면도 필요하다고 느껴서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한도까지는 이러한 실험을 계속해서 내 능력과 실제 모습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나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처럼 이 사회적 활동들을 강행했다. 아니, 다르게 표현하면 그냥 스스로를 실험체로 쓰는 미친 과학자였다. 내가 싫어했던 단체 친목에 뛰어들고, 어색한 상황에서도 목소리를 높여 가며 사람들과 섞여 보려 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즐겁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증명해야 했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있어서 내게 필요한 능력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 내성적이라 판단했던 나의 성격이 진짜인지, 혹은 그 동안 그냥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아와서 그런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이런사람이 또있네 .. 난내가너무뒤틀린줄알았는데 아니 뒤틀렷다해도 암튼 related study가있네 찾으니까 맘좀편해짐
#5
그러나 이러한 끔찍한 사회실험 끝에 남은 것은 공허함뿐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들어와 혼자 있을 때마다, 나는 끊임없는 소모감과 함께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열심히 사람들과 어울리고 떠들면서 에너지를 쏟아붓고 난 뒤, 나에게 남은 것은 텅 빈 공허함뿐이었다. 더불어 내 진정한 자리, 나의 본모습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민과 실험의 시간을 약 1년 반 동안 지속하고 나서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나는 미래에 필요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 충분히 사람들과 어울리고 재미있게 잘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지속할 수는 없다. 그리고 스스로를 소모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는 없다. 나와 맞지 않는 환경에서 억지로 행동하려 하는 것은 결국 나를 지치게 만들고, 내 안의 평온을 깨뜨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필요한 능력이지만 결국 내가 힘들고 불행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게 유예 기간 동안 나와 맞지 않는 ‘새로운 나’를 시도해 본 결과, 나는 더욱 확실하게 내 본래의 성격과 에너지를 알게 되었다. 나를 숨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나다운 모습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능력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그것이 나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시켜 나를 방황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나는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저 내 모습대로, 내 속도대로, 내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나를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6
처음 사회에 나왔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알던 세상은 명확했다. 아니, 세상은 명확해야만 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틀렸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는 그 중간 지대가 너무나 많았고, 흑백으로 구분할 수 없는 수많은 회색 지대가 있었다. 아니, 전부 회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사실은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이때부터 나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인생은 내 시뮬레이션대로 흘러가는 곳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나는 부족하다. 이런 삶 속에서 확실한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던 나의 신중함은 나에게 독이었다
#7
나는 이런 사고방식을 벗어던져 나가고 있다. 나는 이제는 행동이 말을 앞서도록 하고 싶다. 언행일치가 아니고 아예 행동이 말을 앞서 나가고 싶다. 머리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보다 먼저 발을 움직이고, 상황에 부딪히며 스스로를 발견해 가고 싶다. 이론적 완벽함을 추구하던 나에서 벗어나, 불완전한 상태로라도 나아가며 내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다.
행동이 앞선다고 해서 무모하게 덤비겠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 또한 깨달았기 때문이다. 행동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계획을 세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나는 이제 생각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실제 상황에 맞게 변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내가 구축한 이론과 분석력을 바탕으로, 이제는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고자 한다.
#8
행동을 앞세운 삶은 나에게 불편하고 불안한 부분이 많겠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생각과 말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행동으로 직접 경험하면서 쌓여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일단 해 보고, 그 속에서 배워 가자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잘못된 선택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행동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경험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줄 것임을 믿는다. 삶이 계획대로 된다면 계획이 맞았음에 행복을 느끼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예상치 못한 것들에 설렘과 행복을 느끼면 된다. 그러나 보통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말을 알고 있는 책이나 영화는 재미가 반감되지 않는가.
#9
살아가며 내가 특별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회에 나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나는 점점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었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낯설고 당황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특별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이 꼭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무언가 나쁜 뜻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망므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그 다름을 숨기고, 사람들에게 맞추며, 스스로를 ‘더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속이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나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이 정상적이고 그 기준에 나를 맞추기 위해 나의 진짜 모습을 숨겨야 한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다.
#cf
*행복과 불행은 궤도의 이탈이다. 행복, 불행같은 추상적인 척도 대신에 재산, 사회적지위, 친구수, 자기관리 등 현실적인 수많은 수치들을 종합해봤을때 나에게 적절하다고 이미 정의된 수치가 있다고 가정하고. 특정 피쳐에서 그 최대/최소치를 넘어가면 갑자기 삶을 자각하게 되는것이다.
삶을 자각하지 않고 평생 살고 싶다거나 그만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게 생명체의 본질값인데 인간이 너무 지능이 높아서 한번씩 자기가 행동하고 사고함으로써 본인의 한도를 넘어가는 일이 생기고 생명체의 본질에 어긋나는 생각을 할때마다(너무큰만족, 너무큰불행) 즉 생명체로서 응당 지켜야할 궤도에서 이탈함에 따라 갑자기 삶을 자각한다 라는 오류가 발생하게 되는것임.
개나 고양이는 자살하지 않는다. 근데 인간만큼 행복하지도 않을것이다. 몇몇 매체에서 극단적인상황에 자살하는 침팬지나 돌고래 같은 사례가 나오는데? « 이 말에서 이미 인간이기 이전에 생명체로서 극도의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게 왜 오류인지를 알수있음.
#10
사람들이 흔히 정상이라고 여기는 기준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편안해졌다. 더이상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나를 억누르지 않아도 되었고, 내가 느끼는 감정에 솔직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비정상성은 사실 내가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남들과 똑같이 살지 않는다는 것, 남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느나는 것이 나를 진정한 나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나를 맞추지 않으며, 스스로 세운 나만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고자 한다. 내가 비정상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나의 고유함을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였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정상, 비정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나댭냐 나답지 않냐가 있을 뿐이다. 나는 정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정상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는 그냥 나이기 때문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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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 5급 사무관을 때려치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