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24-12-31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소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할 것이 남았어. 내가 처음으로 마을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던 계기, 그 오두막 뒤에 있던 귀환자 말야. 정해진 성년식보다 조금 더 빨리 지구에 가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그 남자에게 몰래 찾아가 물었어. 혹시 지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그는 슬픈 진실을 말해주었지. 지구에서 그가 사랑했던 사람과 그의 쓸쓸한 죽음에 관해. 그가 남겼던, 행복해지라는 유언에 관해.

나는 말했어. 당신의 마지막 연인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냐고. 나는 그에게 지구로 다시 함께 가겠냐고 물었어.

떠나겠다고 대답할 때 그는 내가 보았던 그의 수많은 불행의 얼굴들 중 가장 나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소피, 이제 내가 먼저 떠나는 이유를 이해해줄 거라고 믿어.

그럼 언젠가 지구에서 만나자.

그날을 고대하며,

데이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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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

1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때의 일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너무나 괴롭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지막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다. 할머니는 그 행성에서 구조 신호를 발신한 적이 없다. 할머니의 셔틀이 구조된 장소는 망망대해 같은 우주의 진공 한가운데였다. 할머니는 무리인들의 행성에서 10년을 보냈다고 했지만, 실제로 할머니가 구조된 건 조난 이후 40년 만이었다. 시공간 여행의 시차를 고려하더라도 할머니는 20년 이상을 다시 혼자가 되어 떠돌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오랜 시간동안 할머니는 대체 무엇을 한 걸까? 어쩌면 할머니는 어떻게든 행성에서 멀리 떠날 방법을 찾아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도 그 행성의 위치를 추적할 수 없을 장소에 도달한 다음에야 마침내 구조 신호를 보낸 것인지도.

어쨌든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그 시간의 빈틈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준 적이 없다. “루이는 정말로 죽었을까요?” 그런 질문에도 할머니는 빙긋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2

행성의 위치에 대해 어떤 단서조차 내놓지 않겠다는 할머니의 고집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완고했다. 정부와 기업, 연구소에서 수도 없이 사람을 보내 할머니를 설득했지만 할머니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수십 년의 고독과 외로움에 지쳐 상상 속에서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던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만은 아닌 셈이었다.

3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만날 때는, 우리는 더는 유약한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루이와 할머니의 관계는 재현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 탈출 때 할머니가 협곡에서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뭉치의 종이뿐이었다. 할머니의 말대로 종이 위의 색채들은 마치 누군가 수백 종의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다채로웠다. “이건 루이가 나를 기록하고 관찰한 일기였어. 일종의 연구노트라고 할까. 내가 그들을 관찰하고 탐색한 것처럼 루이에게도 나는 연구대상이었던 셈이지. 어쩌면 그들은 내가 아주 먼 곳에서 온, 도구가 없어 무력한 학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할머니는 나에게 루이가 쓴 기록의 내용을 읽어주셨다. 지구에 돌아온 이후로 할머니는 여생을 색채 언어의 해석에만 몰두했다. 내용의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시간을 들여가며 알아낼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평범한 관찰 기록이었다. 그러나 그중 잊히지 않는 한 문장만큼은 지금도 떠오른다. “이렇게 쓰여 있구나.” 할머니는 그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숨을 거두기 전 할머니는 연구노트의 처분을 나에게 맡겼다. 나는 기록의 사본을 남기고, 원본은 할머니와 함께 화장했다. 찬란했던 색채들이 한 줌의 재로 모였다. 나는 할머니의 유해를 우주로 실어 보내 별들에게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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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가설

만약에 뇌 속의 ‘그들’이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되는 것이라면 어떨까? 마치 기생충이나 미생물이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전염되듯 말이다. 그들은 공기 중에 분포해 있거나, 바이러스처럼 환경에 널리 퍼져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감염을 위한 최초의 접촉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기에 상자 속의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그들’을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던 것이라면? 어쩌면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인간 밖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빈은 그 증거를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수빈은 영상에서 소리 데이터를 추출해서 전환기에 넣었다. 그냥 듣기에는 다른 평범한 아기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울음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유무가 아기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여기서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들의 대화가 아닌 아기들의 욕구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배고파」 「졸려」 「무서워」

수빈은 다음에 일어난 일 역시 알고 있었다. 그 아기들은 사람들이 기대한 대로 성장하지 않았다. 상자 속의 아기들은 이타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재밌게 읽어서 하는 말이지만 인간의 ‘이타성’이 ‘그들’ 즉 외부로부터 온다는 가정을 증명하는 위 부분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상자 속에 집어넣는 실험> 설정은 좀 거슬린다. <태어난 아이들을 충분히 빨리 상자 속에 집어넣음 -> 접촉이 일어나지 않음>인건데 거슬리는 부분은 ‘충분히’이다. 얼마나 빨리 집어넣었길래 혹은 접촉이 어떻게 일어나길래? 미토콘드리아처럼 공생한다고 했으면 의문이 안들었을것 같음. 빈틈없는 논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인데 내 눈에 보이는거면 매끄럽지 않은 진행이 맞는 듯하지만. 뭐 중요한가? 사실 이 말도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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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기술 발전만 보고 달리니까 다른 중요한 가치를 인간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 예전에 유튜브에서 돌고래와 소통하는 실험을 봤던 게 생각났다.

https://youtu.be/1NfgR7LZ3sI?si=q9eMkyp5v9k_bI03 ![image](https://github.com/user-attachments/assets/f150b7ea-0701-4b02-9abe-9b222cd1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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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물성

나는 보현의 서랍장 위에서 수십 개의 감정의 물성 제품들을 발견했다. 하나같이 전부 ‘우울’이었다. 그 옆에는 병원에서 처방받아 온 항우울제가 있었다. 나는 이제 그녀가 우울에 빠져 죽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살아남고 싶은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널 이해 못 하겠어.” 보현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발목이 잡혀 있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녀를 억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우울체’가 그녀의 슬픔을 어떻게 해결해주는가?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울렸다. 보현은 말을 이어갔다. “어떤 문제들은 피할 수가 없어.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지. 무정형의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짓눌려.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나는 허공중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래. 네 말대로 이것들은 그냥 플라시보이거나, 집단 환각일 거야. 나도 알아.” 보현은 우울체를 손으로 한 번 쥐었다가 탁자에 놓았다. 우울체는 단단하고 푸르며 묘한 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동그랗고 작은 물체였다. “하지만 고통의 입자들은 산산이 흩어져 내 폐 속으로 들어오겠지. 이 환각이 끝나면.” 우울체 하나가 탁자 위를 굴러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게 더 나은 결론일까.”

나는 시선을 피했고 그 순간 보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어지는 진동 소리가 짧은 비명 같았다. 잠시 뒤 그녀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달칵 닫혔다. 휴대폰의 진동이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허공을 가득 채운 침묵이 느껴졌다. 보현을 무슨 말로 위로해야 했을까? 나는 순간 보현을 위로할 수 있는 어떤 언어도 나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가슴속에서 빠져나가버린 듯 싸늘했고, 나는 그게 생각이나 관념이 아닌 실재하는 감각임을 알았다. 그제야 어설프게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머물렀다 사라져버린 향수의 냄새.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 오래된 벽지의 얼룩. 탁자의 뒤틀린 나뭇결. 현관문의 차가운 질감. 바닥을 구르다 멈춰버린 푸른색의 자갈. 그리고 다시, 정적.

물성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가. 나는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떨구었다.

*결말이 이해가 안돼서 여러번 읽었는데 그래도 이해가 안된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