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계를 조율하기 #
#2026-08-28
순응 반응은 안전하다는 감각이 충분하지 않을 때 활성화된다. 우리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타인의 요구를 지각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거기에 맞추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과도하게 활성화된 채 끊임없이 불안정한 상태로 살아가도록 설계된 존재가 아니다. 만성적인 트라우마 반응에 빠져있다는 것은 신경계 조절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다.
따라서 순응 반응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단계 가운데 하나는 상시적인 각성 상태를 가라앉히는 방법을 배우고, 신경계를 조율해 내면의 안전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럴때 우리는 순간적인 반응에 휩쓸리는 대신 적절한 대응을 선택할 수 있다.
신경계 조율은 ‘항상 차분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잘 조율된 신경계란 유연한 신경계를 의미한다. 교감신경계와 부교감신경계가 상황에 맞게 조화를 이루며 작동하는 상태다.
신경계가 조율된 상태에서 우리는
또한
신경계가 잘 조율될 때 자신 안에도, 관계 안에도 더 많은 ‘공간’이 생긴다. 잠시 멈추고 “글쎄요.” 혹은 “생각해 볼게요"라고 말할 여유가 생긴다. 순응하려는 자동 반응과, 실제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자각하는 사이에는 바로 그 공간이 필요하다.
신경계 조절의 어려움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과잉각성은 자극이 과도한 상태로, 대표적인 증상은 다음과 같다.
- 짜증, 분노, 불안이 쉽게 올라온다.
- 몸이 떨리거나 안절부절못하고 쉽게 놀란다.
- 특정 생각을 수없이 반복하며, 집중하거나 잠들기 어렵다.
- 심장이 빠르게 뛰며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든다.
- 감정이 너무 격렬하고 강해서 여기에 압도된다.
반대로 과소각성은 자극 수준이 지나치게 낮은 상태다. 감정과의 연결이 약해지고 신체적 반응도 둔해진다. 흔히 다음과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 멍하거나 현실과 분리되 느낌이 든다.
(이건 평소에 항상 그런데… 그나마 아닐때는 멍하게 살면서 기록한 내용들과 찍은 사진들을 다시 정리할때? 아니면 재미있는 예능이나 영화를 보고 감상을 적을때, 아니면 공부해서 뭔가를 이해했을때? 그리고 그걸 기록할때? 이렇게 보니까 나는 그냥 내 글 안에서 사는것 같네…) - 몸에 힘이 없고 약하게 느껴진다.
- 무감각, 우울감, 공허함, 혹은 전원이 꺼진 듯한 느낌이 든다.
- 고립을 택하고, 무엇이든 지루하게 느끼며, 외부 자극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순응 반응은 이 두 상태가 결합된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다. 위협을 감지해 과잉각성 상태에 놓이면서도, 겉으로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억누르며 과소각성 쪽으로 이동한다. 어떤 폭풍 속에서도 춤추고 노래하며 연기를 한다. 팽팽한 밀고 당김이 공존하는, 매우 불편한 상태다.
따라서 순응 반응에서 벗어나는 작업은 우리의 중심을 회복하도록 돕는 연습을 통해 신경계를 조율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어떤 활동은 속도를 늦추는 데 도움을 주고, 또 어떤 활동은 쌓인 에너지를 흘려보내는 데 도움이 된다.
순응 반응에서 벗어나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이 일은 모두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순응을 멈추는 일은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분주한 우리 ‘생각’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상황에 따라 어느 편에든 설 수 있고, 끝없이 의심을 만들어 내며, 정작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과는 무관한 판단을 끼워 넣기도 한다. 우리가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온몸을 탈탈 털듯 흔들어도 좋고, 벽에 공을 던졌다 받는 단순한 놀이, 줄넘기나 트램펄린, 차가운 물로 세수하기, 다리를 벽에 올리는 요가 자세, 운동이나 영양가 있는 음식을 챙기는 일도 모두 신경계 조율 활동에 해당한다.
창의적으로 접근해 보자. 지난 경험들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내가 흐트러졌을 때, 나를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돕는 것은 무엇인가?”
‘완벽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연구실의 화학자처럼 매 순간 저울질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계속 흔들릴 것이다. 트리거에 자극받을 것이고,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나, 혹은 그 둘을 동시에 느끼는 날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조건 안에 더 깊이 머무르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자기 연민을 회복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을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경계를 조율하는 힘을 기른다는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할 때 따라오는 불편함을 견디는 능력을 키운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를 늦추는 방법이다. 불편한 감각이 올라오면 천천히 열까지 세어보거나, 주변의 사물을 바라보며 현재에 방향을 맞춰보자. 가슴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나한테 필요한 것을 말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마음속 통증을 견뎌보자.
자신을 축소하거나 숨기지 않고
이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나는 위험한가, 아니면 단지 불편한가?”
몸은 과거의 기억을 호출하며 위험을 경고할 것이다. 그러나 생존 반응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지금 이 시간과 장소로 발을 옮기는 일이다. 트리거는 회피의 이유가 아니라, 내면으로 들어가 감정과 함께 머물 기회가 된다. 그렇게 불편을 견디는 근육을 기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가려 하든 나침반의 바늘은 결국 순응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의 나침반은 다른 방향이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나침반을 360도 활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조금씩 각을 넓혀가는 중이다.
우리가 갈등의 조짐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을 때, 각이 성큼 넓어진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도 즉시 구조자를 자처하지 않았을 때, 또 한번 각이 넓어진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고 성실히 답할 때, 바늘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나침반의 범위 전체를 자유롭게 영위하게 된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지점이다. 이것은 한순간에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과정이다. 순응 반응이 한발씩 물러설 수 있도록, 내면의 지지를 쌓아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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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 정신 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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